낯선 외침

by 고경석


1.

연우는 사랑했던 사람과 삶의 궤적을 뒤로하고 이젠 혜인의 안부가 걱정이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시간을 따라서 맴돌고 현실 앞에 놓인 문제도 시간을 쫓아 다가왔다. 괜스레 커피 잔을 살피다가 테이블과 소파도 재차 정돈하면서 마음 가짐을 고쳐본다.

금요일 밤을 맞이할 때다.


- 6시 45분, 연인으로 보이는 이십 대 남녀가 다정한 얼굴로 들어왔다. 여자는 카페모카, 안경 쓴 남자는 마키아토를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서로가 달콤 발랄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 7시 5분, 이십 대 후반의 여자 셋이 카페를 찾았다. 단골손님들이다. 카페로부터 조금 떨어진 과자공장에 다니며 회사 기숙사에서 지낸다. 금요일 밤엔 강변 카페를 찾지 않았지만 오늘 밤은 예외가 되었다. 그녀들은 초콜릿 마니아들이다. 과자공장서 질릴 법도 한데 그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콜릿은 철옹성 같은 성안에서 보호받는 공주와 동격이고, 공주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녀들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사장님, 초콜릿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언젠가 그녀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아니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노 어린 표정이 엿보여 체감상 크게 들리는 듯했다. 카페를 맡은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난감했다.


"초콜릿은 주변 냄새를 쉽게 흡수해요. 밀폐에 신경을 써야 할 거예요."


연우가 당혹해 하자 보다 못한 다른 한 명이 훈계에 가까운 조언을 했다. 연우는 그마저 고맙게 받아들여 그녀들을 위해 값비싼 밀폐용기를 따로 사들였다. 지금은 냉장고 안에서 밀폐용기 보호 속에 초콜릿은 제맛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 밤 그녀들은 블랙커피와 초콜릿 브라우니, 초콜릿 무스를 주문했다.


- 7시 30분, 중년 부부가 카페를 찾았다. 역시 단골이었고 강물이 훤히 보이는 창가 가장자리는 부부의 지정석이 되었다. 금요일 밤에는 과자공장 그녀들처럼 카페를 찾지 않았는데 뜻밖에 모습을 보였다. 부부는 자동차로 십분 거리의 전원주택에 살면서 카페 수익에 도움을 주었다.


전원주택 단지에는 현재 십여 가구가 입주한 상태이고 한 달에 한 번 독서토론회도 부부 주도로 카페에서 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부부를 포함해 다섯 명, 많을 땐 여섯 명 정도 됐지만 책 내용보다는 주변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하며 웃고 떠들 때가 많았다. 부부 덕분에 전원주택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카페를 찾는 일도 늘고 있었다.


부부는 또한 홍차에 진심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남편은 조지 오웰의 좋은 차 마시기 열한 가지 방법을 애창하는 노래처럼 틈만 나면 읊조렸다. 아내는 맞은편에서 심드렁했지만 홍차 자체를 좋아하는 건 변함없다. 연우는 부부가 고마워 양질의 찻잎을 구했고 특별히 고가의 다관 세트도 준비했다. 물론 부부는 연우의 숨은 노력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부부는 오늘 밤에도 구석진 창가에서 차의 맛과 향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2.

창밖에는 소리 없이 깔린 어둠이 달빛을 불렀고 강물은 반짝이는 잉어비늘처럼 도도히 흘러갔다. 여느 때처럼 평온한 일상이었다.


- 8시 35분, 주차장 쪽에서 자동차 불빛이 흔들렸다. 곧이어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삼십 대 초반의 남자가 카페에 홀로 들어섰다. 범준이 탁 트인 주방에서 일하던 연우 발견하자 화장실을 급히 찾았다.


"화장실이 어디죠?"

"왼쪽으로 가세요."


이 시간 남자 홀로 강변 카페를 찾는 게 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을 때 입구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연한 올리브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카페로 들어섰다. 미연은 입구에 서서 내부를 잠깐 훑더니 중년 부부가 있는 테이블 바로 옆 빈자리가 원래부터 자기 자리인양 곧바로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토라진 표정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온 범준이 미연한테 다가가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다시 카운터 쪽으로 왔다.


"비엔나커피 되죠?"

"네, 됩니다."

"두 잔 주세요."


범준이 자리로 돌아가 미연한테 뭔가를 해명하고 있다. 강변 카페는 계획에 없었지만 남자의 생리현상 때문에 부득이 방문한 듯싶었다. 범준은 바로 그 점에 대해 미연한테 양해를 구했다. 서로가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만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이였다.


연우는 미연이 혼자 카페로 들어선 순간부터 한 가지 의문에 휩싸였다. 낯선 여자들 방문에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곽이 잡히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입구를 쳐다보며 단서가 될만한 걸 찾다가 불현듯 떠오른 하나의 사실 마음에 걸렸다.


'날 모르겠어' 하고 낯선 여자가 말을 건넸던 경우는 혼자서 카페로 들어섰을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연우가 인지했던 상황하에 선 그랬다. 오늘 밤만 해도 올리브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혼자서 카페 문턱을 넘었다. 터무니없는 추측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여기저기 널린 사소한 단초들은 몸집을 불리며 인간의 겁먹은 사고를 좀먹으려 하니까. 최소한 올리브색 원피스 여자를 예의주시할 이유가 생겼다.


- 8시 40분, 젊은 커플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카페를 나섰다.


- 8시 55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카페로 들어와 아메리카노와 바닐라커피를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한 남자는 MLB 로고가 찍힌 검정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손님들이었다. 금요일 밤 강변 카페와는 이질감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의 연우한테는 우습게도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 9시 5분, 지금 이 시각 카페에는 여자만 다섯 명이다. 중년 여성, 과자공장 여성 셋, 올리브색 원피스의 미연. 그중에서 미연만 초면이었다

3.

시간은 어느덧 밤 9시 10분을 향했다. 중년부부가 활짝 웃으며 연우와 인사를 나누고 카페문을 나섰다. 분위기는 평소와 똑같았다. 연우는 내심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아는 체할까 조바심 났지만 지금 상황에선 당치도 않을 망상 같았다. 미연은 처음 뽀로통했던 표정과는 달리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연우를 아는 체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게 상식적이다.


연우가 강변에 마음을 둔 이유도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준식의 말마따나 망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그보다 손님을 위해서 맛있는 메뉴를 준비하고 때때로 테라스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황금빛 노을을 시선에 담으며 살고 싶었다. 강변을 선택해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소중한 걸 놓지 않았다면 무엇을 잃어야 했을까. 딜레마에 빠질 수 있으나 그게 싫었기에 강변의 삶을 선택했다. 흘러가는 강물과 황금빛 노을, 온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괜찮은 삶이라 믿고 싶었다.


"나 모르겠어?"


아메리카노와 바닐라커피가 완성돼 호출 벨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미연이 다가와 대뜸 건넨 한마디였다. 연우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미연을 쳐다보자 경직된 얼굴이 먹이를 노리듯 쏘아보고 있었다. 처음엔 이 순간이 무수한 착각 중 하나로 여겨졌다. 여자가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게 틀림없다고 장담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전등빛에 노랗게 물든 미연의 얼굴은 굳어 있긴 해도 한 번쯤 눈길이 가게 만들었고, 올리브색 원피스는 어른 키로 자란 요정 팅커벨을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연우 입장에선 '물론 알고 있어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지만 연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별수 있겠나. 또다시 절망적인 심정이다. 동시에 연우는 미연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표정의 변화가 없다. 인간의 감정이 사라진 로봇 같다고 할까. 화사했던 미소는 어디 가고 냉혈한 살인마처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연우가 모르겠다고 입장을 밝혔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나. 그녀가 침묵으로 일관하니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생각해 보면 금요일 밤 여자들 공통점은 무반응과 무표정의 연속이었다.


폭우가 내렸던 밤 이후로 낯선 여자들 접근이 신경 쓰였지만 그나마 카페 일에 집중할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낮 동안에 영신이 '요즘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았나요'하던 말도 머릿속을 헤집었는데 미연과 눈싸움하듯 전개된 지금의 대치가 수렁에 빠지기 직전에 헛디딘 발걸음인양 더러운 기분을 불러왔다.


"저도 아는 사이였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당신을 정말이지 몰라요."


연우가 하소연하듯 말해도 미연은 여전히 침묵 모드였다. 인내심도 바닥나 이제라도 여자한테서 관심을 거두고 카페 일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미연이 소리치며 카운터 상단을 두 손으로 힘껏 내리쳤다. 뚜뚝, 손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그녀의 얼굴 표정은 변화가 없다. 유리병이 흔들리고 빈 찻잔들 몇 개도 뒹굴며 떨어져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연우는 깜짝 놀랐고 카페 손님들 시선도 카운터 쪽으로 몰렸다. 미연은 충혈되고 원한 섞인 눈빛이었다. 손목 부위도 부어오르며 퍼렇게 멍이 들고 있었다. 연우는 사지가 마비된 듯 멍하니 악에 받친 미연을 쳐다볼 뿐이었다.


"미연 씨, 무슨 일인가요?"


범준이 놀란 얼굴로 급히 다가왔다. 미연은 남자의 물음엔 아랑곳 않고 연우를 쏘아봤다. 범준은 이번엔 연우한테로 시선을 돌려 의심의 눈초리를 겨눴다.


"무슨 일이죠?"


범준이 다그치자 연우는 당혹감 속에 남자를 쳐다봤다. 그 와중에 미연 곁에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처럼 여겨졌다. 범준이 여자의 분노를 잠재우고 지금의 사태를 무난하게 수습하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감.


"여자분이 날 아신다고 하는데 나로선 처음 보거든요."


연우가 해명하자 범준은 미연한테로 얼굴을 돌렸다.


"날 알고 있잖아!"


미연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고, 범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연 씨?"


범준이 달래듯 소리쳤지만 미연은 여전히 무엇에 홀린 듯 연우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연 씨, 날 좀 봐요. 이 사람을 정말 알고 있나요?"

"날 알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알고 있단 말이야!"


미연이 성난 앵무새처럼 외치자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예사롭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은 다른 손님들도 느꼈다. 응축된 에너지가 공간 속으로 퍼지 듯 미지의 힘은 피부를 관통하고 크고 작은 전등을 후려친 뒤 유리창에까지 충격파를 날렸다. 전등은 몸살 난 것처럼 깜박거렸고 창문에도 간헐적 떨림이 일어났다. 시에 미연이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주변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119 좀 불러줘요!"


범준이 미연의 상체를 감싸 일으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연우도 정신을 차리고 전화기를 급히 찾았다.


이날 밤, 미연이 의식을 잃은 채 119에 실려 갔고 범준은 타고 왔던 승용차를 주차장에 놔두고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와 함께 어둠을 뚫고 사라졌다. 연우는 이 밤에 벌어진 상황이 악몽 같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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