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by 고경석


1.

연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병원으로 실려간 미연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서 심란했고,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지 이해 못 해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한 남녀가 은은한 전등불빛을 받으며 사랑을 키워가던 밤이었는데, 미연이 돌변해서 무표정한 얼굴로 괴성을 지를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연우는 생수를 들이켰지만 뒤숭숭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금요일 밤 생긴 일중에 오늘처럼 심각한 날은 없었다. 낯선 여자와 처음 조우했을 때 연우가 '모르겠는데요"하고 부정하면 여자들은 대개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애인이나 동료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여자를 부축해 돌아가면 다행히 사태는 무마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금요일 밤이 몇 번을 거치면서 낯선 여자의 접근은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오늘 밤이 최악이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도 없다.


'혹시 요즘에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았나요?'


연우는 낮에 영신이 남긴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별일 아닌 듯 넘기고 싶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아 다시 그녀의 말을 곱씹는다. 영신이 지목했던 이상한 일은 금요일 밤 낯선 여자들을 겨냥했던 게 틀림없다. 최근 자신이 겪었던 일들 중에 금요일 밤은 빼놓을 없었기에.


개인한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상한 일은 한 번으로도 벅차다. 그런데 일주일 간격으로 생긴다면 상황은 아주 심각하다. 더 큰 문제는 그 같은 현상을 설명은커녕 이해할 수도 없었다. 새벽 3시가 지났고 의식의 파장은 지칠 기미가 없다.


2.

언제 잠든 지도 모르게 연우가 눈 뜬 건 새벽녘 주차장에서 들려오는 엔진음 때문이었다. 평소 같으면 무심히 넘겼을 테지만 얕은 잠의 여파로 바깥 인기척이 귓가에 생생히 닿았다. 연우는 간이침대에서 버틸까 했지만 문득 궁금증이 발동해 몸은 벌써 눈 비비며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창을 통해 바라본 주차장은 동트기 전이지만 어둠은 약해졌다. 며칠 동안 꼼짝 않는 소렌토 옆으로 은색 벤츠의 엔진음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강변으로 퍼졌다. 범준이 타고 왔던 차였다. 간밤에 진입로 차단바를 내리지 않았기에 벤츠는 작정만 하면 카페를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 곧 출발하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변심이 생겼는지 주차했던 자리로 돌아갔다. 범준이 벤츠에서 내렸고 카페 쪽을 빤히 쳐다봤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임에도 그의 어깨는 간밤에 벌어진 일로 축 처져 보였다. 범준이 창가에 서있는 형체를 발견했는지 입구 쪽을 향했고 연우도 범준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 카페 밖으로 나왔다.


"어, 안에 있었네요!"


깔끔했던 용모 대신에 피곤함이 역력한 범준이었다. 연우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잘 됐네요. 혹시 커피 좀 마실 수 있을 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우와 범준은 희미한 전등불빛과 새벽의 적막이 감도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로 테이크 아웃 부탁할게요."


범준이 카운터 바로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벽시계는 오전 5시 43분을 가리켰다. 이 시간에 다른 사람을 위해 커피 만들기는 처음이었다. 연우는 혼자 즐겨 마시던 드립커피가 시간을 단축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분쇄기로 원두를 갈고 커피포토에 데운 뜨거운 물을 원처럼 그리며 천천히 붓자 갈색 거품이 생기며 부풀어 올랐다. 커피를 만드는 동안에 하나의 궁금증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연우는 범준한테 미연의 상태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한 참견 같아 망설였다. 그 와중에 커피가 완성됐다.


"하, 생각할수록 정말 별일이네."


연우가 직접 커피를 전달하려 할 때 범준이 혼잣말로 투덜댔다. 남자의 예상 못한 푸념에 행동을 달리 소환했다.


"커피 준비가 됐습니다."


우가 말하자 범준이 하품을 하다 말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여자분은 어떻게 나요?"


연우가 마침내 물었다.


"새벽에 깨긴 했는데 카페 일은 전혀 기억이 없다네요."


준이 종이박스에 담긴 커피잔을 받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얼마죠?"

"그냥 드세요."


연우가 사양하자 간밤의 일에 대해 보상인 범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잘 마실게요."

"네."


범준이 카페를 나서려다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돌렸다.


"왜 사장님을 알고 있다고 말했을까요?"

"글쎄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잘 모르겠네요."

"하기야 웃긴 건 본인 역시 기억에 없다니까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

"어쨌든 상관없어요. 그 여자와 끝났으니까."


범준이 간밤에 무방비로 당한 피해자인양 허탈한 웃음 남기며 카페문을 나섰다.


연우는 여분으로 받았던 커피를 마시며 범준과의 짧은 대화를 복기다. 미연은 새벽쯤에 의식을 찾았고 카페에서 일어난 일은 기억에 없다고 했다. 여자가 보인 행동으로 연우도 혼란스러운데 바로 옆에서 지켜본 범준은 어떠했을까? 두 사람은 막 시작하는 관계였지만 결국 파국을 불렀다. 범준의 결정으로 둘 사이가 끝났다면 이기적이라 비난할 수 있고, 이해한다고 위로할 수도 있다. 일상을 벗어난 초자연적 상황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대처할 행동이 무엇이 있겠는가.


금요일 밤 낯선 여자들도 인들 돌발 행동으로 상처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기억이 끊겨 타인에 의해 자초지종을 들어야 한다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까? 결과적으로 금요일 밤은 서로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있었다.


3.

토요일, 가을 문턱 넘어서자 강변을 둘러싼 산에서 계절의 옷이 빨갛게 노랗게 바뀌고 있다. 작년 이맘때처럼 초가을 정취에 취하고 싶으나 지금은 그 같은 정서를 누릴 여유가 없다. 오늘도 손님들이 평소보다 늘었지만 연우가 내심 기다렸던 영신은 보이지 않았다. 예상은 했으나 막상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조바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주말에 카페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찾은 적이 있었지만 연우의 기억 속에 없었던가.


토요일 밤 영업이 끝날 때까지 영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일요일도 여느 때처럼 흘러갔다. 이틀 연속 제대로 잠을 못 자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컨디션도 최악이었지만 카페를 찾는 손님들여전해 시간은 제 홀로 움직였다. 영신은 일요일에도 수 없었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다. 자정이 되었을 땐 녹초가 되었지만 월요일엔 쉰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다음 날 눈부신 햇볕이 이층 창가에 머물 때 연우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함이 덜 풀렸지만 서둘 씻고 커피와 어제 남은 샌드위치로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주차장에는 소렌토가 홀로 자리를 지켰다. 구름 한 점 없는 세상은 흐르는 강물만 빼면 사진 속 한 장면 같았다. 낯선 자동차가 주차장에 들어설 기미도 없었다. 진입로에는 차단바가 주차장 출입을 막아섰고 '오늘은 쉽니다'하고 빨간 글자 안내판도 이곳을 잊힌 카페만드는데 일조했다.


연우는 오늘 부모네 집을 찾아갈 생각이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자식은 부모의 무한보호가 필요했나. 사실은 추석이 다가오고 있어 그전에 방문하는 게 속편 할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작년처럼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이면 가족친지의 성화를 한 몸에 받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런 점에서 카페는 완벽에 가까운 핑계감이자 실제적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가족친지는 명절연휴 대목을 위해 장사에 여념 없는 그의 부재를 이해하리라.


연우가 인기척을 느낀 건 오전 10시가 지나서 외출하려고 할 때였다. 주차장 진입로 쪽에서 사람의 형체가 언뜻 보였다. 창가서 살펴보니 카페로 접근하는 수상한 장본인은 뜻밖에도 연우가 그토록 기다렸던 영신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나타났다.


타고 다니던 차는 도로변 갓길에 세웠는지 영신이 두툼한 누런 종이박스를 품에 안고 혼자서 종종걸음으로 주차장을 횡단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연우는 이 시간 그녀의 출현이 궁금했다. 그렇지 않아도 금요일 밤부터 만나고 싶었기에 단숨에 카페문을 열고 영신을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부탁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고양이 사체를 야산에 묻으면 안 될까요?'


영신이 며칠 전에 부탁을 했었고, 연우는 암묵적 태도로 받아들였다. 좋은 일 한다는데 애써 훼방꾼 노릇 할 필요는 없었다. 영신의 품속에는 고양이가 죽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떡하나? 일단 못 본 체할까. 동행했던 용섭은 안 보이고 왜 혼자 일까? 홀로 움직이는 여자 앞에 접근한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연우가 망설이고 있을 때 영신이 카페 옆 좁게 트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을 보면서 연우는 확신했다. 영신이 죽은 고양이 때문에 이름 모를 야산을 오르고 있다는 것을.


연우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다. 외출을 잠시 미루고 영신이 다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카페문을 나서니까 10월 초순의 강변 바람이 코끝을 시원하게 자극했다. 연우는 주차장 옆 색 바랜 벤치 앉아 좀 전에 영신이 올라갔던 비좁은 산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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