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신이 야산으로 올라간 지 40분쯤 지났고, 연우가 초조감을 느낄 때 그녀가 산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조금은 지쳐 보였다.
"안녕하세요!"
연우가 뜻밖의 만남인 것처럼 벤치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영신은 연우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며 인사했다. 얼굴은 땀에 젖었고 옷과 운동화에도 진흙처럼 보이는 흙이 묻었다. 오른손엔 흙 묻은 모종삽도 쥐어졌다.
"고양이 때문에 오셨나 봐요?"
"네."
영신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오늘은 혼자시네요."
"직원이 이런 일에 좀 귀찮아해서... 그럼...."
영신이 떠나려는 찰나 연우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연우의 외마디에 영신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여쭤볼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사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연우가 속마음을 털어놓자 영신은 탐색의 눈빛을 보이더니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 까요?"
영신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다시 밀치자 연우가 뒤늦은 깨달음처럼 즉각 반응했다.
"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연우는 급히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영신은 벤치에 앉아 강 너머 사라지는 초록세상에 시선을 두었다.
"자, 받으세요."
"고마워요."
연우가 카페에서 생수와 물수건을 가지고 나와 영신한테 건넸다. 영신은 생수병뚜껑을 열어 몇 모금 마시고 물수건으로 얼굴의 땀도 천천히 닦았다. 연우는 그녀 옆에 앉아서 말없이 지켜봤다.
"아직 통성명도 못했네요. 박연우라 합니다."
"이영신입니다. 왜 저를 기다렸던 거죠?"
영신의 물음에 연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한테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냐고 물었죠?"
영신은 기억하는 눈치였다. 이미 연우가 무엇을 염두해서 말하는지 아는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 정말 있었나요?"
"믿어지지 않지만 네, 일어난 것 같아요."
연우는 금요일 밤에 벌어진 일들을 털어놨다.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두려움이 생겼다고. 더구나 며칠 전 금요일 상황이 심각해서 아직도 혼란스럽다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바로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이 생각나 기다렸다는 얘기를 이어갔다.
"저한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확신할 순 없었어요. 그냥 느낌 같은 거였죠."
"느낌요?"
"말로 설명할 순 없어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 딱히 단정 짓기 어렵네요. 그냥 영적이랄까. 그렇게만 생각해 주세요."
"글쎄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네요."
연우의 말에 그녀는 난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신의 회상
- 영신은 자신한테 신비한 능력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길가 수풀에 웅크리고 있던 새끼 고양이 때문이거나, 기억을 좀 더 더듬으면 새끼 고양이가 자신을 불러 세웠던 순간일 수도 있다. 또래 동네 친구들과 깔깔깔 웃고 재잘거리며 거리를 걷던 중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를 느꼈고, 메마른 수풀에서 지저분하고 비쩍 마른 새끼 고양이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어린 영신은 단번에 알아봤다. 그녀는 주어진 운명처럼 새끼 고양이를 품속에 안은 채 집으로 데려가 엄마의 반대에도 고집을 부리며 보살폈다.
- 당시 새끼 고양이의 처참한 몰골이 신경 쓰여 미처 의식을 못했지만 고양이 부름에 반응했을 때가 영적 체험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접했다. 강아지나 고양이 장례 중에 보이지 않는 영혼과의 교감, 생면부지 사람한테서 떨림처럼 전해오던 아픔, 침묵 속에 죽음으로 내몰린 안타까운 사연들, 새찬 눈보라가 치던 밤 진실이 드러나자 울음바다가 되었던 영혼의 울림들이 영신의 뇌리로 스쳐갔다. 그리고 지금, 기이한 현상을 겪는 한 남자가 도움을 요청했다.
"금요일 밤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연우의 말에 영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결혼하셨나요?"
영신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뇨."
연우가 짧게 대답했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지금 사귀는 여자분이 있나요?"
"아뇨."
역시 짧은 대답. 연우는 살짝 불쾌감을 느꼈고 자신의 행동에 의문도 들었다. 대화가 트인 지 얼마 안 된 여자한테 개인사까지 들먹이자니 기분이 찜찜했다.
"그럼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나요?"
이번 물음엔 연우는 즉각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과 닮은 여자가 있었죠 하고 마음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네, 있었어요."
"그 여자분은 살아 계시고요?"
영신이 무심히 던진 질문이었지만 연우는 순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애써 내색하지 말고 차분하자고 마음을 다졌다.
"당연히 살아 있죠."
연우는 확신하면서도 불길한 느낌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은근히 화도 났다. 영신의 거침없는 질문이 불쾌했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거나. 무엇이 실체에 가까운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그 여자분 결혼은 했고요?"
"아직 안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친구한테서 조만간 식을 올린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렇군요."
영신은 의아한 듯 생각에 잠겼다가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사귀었던 여자가 또 있었나요?"
영신의 질문에 연우는 살짝 당황했다.
"아뇨."
연우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요?"
영신은 미궁 속 사건을 접한 형사처럼 난감한 표정이다.
"왜 그런 질문들을 하시는 거죠?"
연우가 참지 못해 감정을 표출했고, 영신은 대답 대신에 시선을 연우한테로 고정시켰다.
"금요일 밤마다 모르는 여자들이 찾아온다면서요!"
영신이 질타하듯 말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영신이 던진 한마디가 강한 펀치가 되어 연우의 의식은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준식이 했던 말, 영신이 쏟아낸 질문들, 그 의미들 속에 연우가 생각하는 단서들. 금요일 밤 현상에 혜인을 끌어들임에 대해. 나직이 터져 나온 헛웃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찾아온 침묵.
"저한테 더 하실 얘기는 없나요?"
"음, 혹시 당신은 뭐라 하죠... <사랑과 영혼>에서 우피 골드버그가 맡았던 역할, 그러니까 영매 같은 겁니까?"
연우는 그녀에 대해 진작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그냥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로 알고 계시면 좋겠네요."
영신의 회상
- 지난 세월 무수히 자문했던 단어 중 하나를 옆에 있던 남자가 다시 꺼냈다. 일상에서 자기도 모르게 발현되었던 영적인 힘들.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 자신의 신비한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책에는 해답이 있을까 뒤적였지만 그에 대한 결론은 좀 전에 연우가 말했던 영화 속 우피 골드버그에 가장 근접했다. 죽은 혼령과 살아있는 인간의 대화를 매개한다니. 그에 대한 사실여부를 떠나 처음엔 충격이 컸다.
-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자연법칙을 넘어선 초자연적 체험들이 두려워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일에 더욱 열정을 쏟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처한 상황도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게 빤히 보이는데 모른 척한다는 사실이 갈등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정체성 혼란은 그 시간 속에서 차츰차츰 희석된 느낌이었다. 지금은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로 살아가면서 가끔씩 영적 체험하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어떤 삶. 그게 영신의 삶이었다.
"금요일 밤 카페로 올게요. 어쩌면 제가 낯선 여자가 될 수도 있겠네요. 괜찮겠어요?"
영신이 일어나며 말했다. 표정은 결연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닙니다."
2.
연우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무언가 말하려다 단념했다. 영신은 잠깐 망설이던 연우를 의식했지만 생수병과 물수건을 다시 건넨 후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연우는 주차장 입구로 멀어지는 영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금 자신이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지 돌아봤다. 어떡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 같다.
영신이라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 믿음을 주는 구석은 있었다. 죽은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 하며, 금요일 밤 벌어진 일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먼저 낌새를 알아채기도 했다. 그녀한테 뭔가 비범한 능력이 있는 듯 보였지만 애써 부인하려는 태도는 역설적으로 더욱 큰 신뢰감을 주었다. 그런 그녀가 금요일 밤에 온다고 말했다.
연우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게 있었다. 영신한테 알릴까 주저하던 사안이었다. 혜인이 한 달 가까이 연락이 두절된 상태인데 연관성이 있을까? 아니다. 터무니없다. 금요일 밤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영신이 아무리 옛 연인을 들먹이며 중대성을 강조해도 혜인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금요일 밤 영신이 오겠다고 했으니 그땐 뭐라도 실마리가 잡히겠지. 일단 지켜보자.
이젠 외출을 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