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씨가 마르고 있는 한국 멜로 영화, 왜 그럴까?
종종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게시물이 하나 올라오면, 다양한 장르 영화들이 거론된다. 그중에서도 우리네 감성을 건드리며 울고 웃게 만드는 멜로 영화들도 추천작 리스트에서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한국 멜로 영화가 무엇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1990년대 작품들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는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 '8월의 크리스마스', '약속', '편지' 등이 개봉해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공했다. 이와 맞물려 주연을 맡았던 한석규, 박신양, 전도연, 심은하 등은 충무로 스타로 등극하기도 했다.
2000년대 뉴 밀레니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 멜로는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동감', '시월애'가 2000년이 되자마자 스타트를 끊어주더니, '번지점프를 하다', '와니와 준하', '봄날이 간다'(이상 2001년 개봉), '연애소설'(2002년), '국화꽃 향기', '클래식'(이상 2003년),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년), '너는 내 운명'(2005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년) 등등 매해 끊이질 않고 관객들과 만나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수작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흥행력도 좋았다. 아직 '천만 영화'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극장에 걸리면 100만 명 단위를 넘기는 작품들이 꽤나 많았다. 특히 '늑대소년'은 무려 706만 관객을 동원했고, 뒤를 이어 '내 아내의 모든 것'(459만 명), '건축학개론'(411만 명) 순이다. 2000년대 초반보다 살짝 주춤했던 적도 있었으나, 2010년대 초반까지 멜로 파워는 이어져왔다.
2022년 현재, 한국산 멜로 영화 근황은 어떨까. 10년 전 '건축학개론'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국민 첫사랑'으로 떠오른 수지의 뒤를 이을 '제2의 수지' 찾기 열풍이 불었던 그 시절과는 온도 차가 확연히 달라졌다. 언제부턴가 극장가에서 멜로 영화가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최근 5년간 극장에 상영된 멜로 영화 수를 살펴보면 참담하다. 다양성 영화를 제외하고 2017년에는 3편, 2018년에는 6편, 2019년에 10편 조금씩 늘어나는가 싶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불어닥쳤던 2020년부터 꺾였다. 당시 한지민, 남주혁 주연의 '조제' 한 편만 극장에 겨우 걸렸다.
지난해에는 다양성 영화 및 복합장르 포함해 '멜로' 장르로 표기된 영화는 '아홉수 로맨스'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 '장르만 로맨스', '연애 빠진 로맨스' 그리고 OTT와 극장 동시 개봉을 택한 '해피 뉴 이어'까지 다섯 편이다. 1년 전보다 개봉작 수는 늘긴 했으나, 한국 멜로 영화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국 멜로 영화가 점점 희귀종이 되어 가는 이유를 꼽자면, 예전과 달리 만들기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멜로 영화는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다루나, 이를 특별하게 느끼게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을 중심으로 캐릭터의 심리 묘사 및 관계성이 중요한데, 이를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서 함축해 모두 표현해내기란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는 TV, OTT 등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들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화보단 긴 호흡을 이어가기에 감정으로 다가가야 하는 멜로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사랑이나 감정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 로맨스나 코미디 등 다른 조미료를 많이 첨가하지 않아도 된다.
멜로는 그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토리를 뽑아내거나 구성이 매우 탄탄해야 했다. 다른 장르 영화도 비슷하겠지만, 멜로는 출연하는 배우들을 제외한다면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외형적인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에 내실 다지기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고 난이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멜로를 기본 삼고, 여기에 다른 장르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시나리오가 좋아도 영화 제작까지 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다른 장르 영화들과는 달리 멜로 영화를 찾는 관객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바로 캐스팅. 드라마, OTT와는 다르게 영화는 누가 출연하느냐에 따라 관객 동원 수, 흥행 여부가 결정된다.
이는 한국 멜로 영화 역대 흥행 순위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늑대소년', '내 아내의 모든 것', '건축학개론'이 한꺼번에 대중에게 공개됐던 2012년 이후 TOP10에 진입한 최근작은 '가장 보통의 연애'(8위-285만 명, 2019년), '너의 결혼식'(9위-280만 명, 2018년)이 전부. 범위를 좀 더 넓혀 최근 5년간 손익분기점을 넘어 "흥행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영화들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260만 명, 2018년)까지 포함해 딱 3편 정도.
'가장 보통의 연애', '너의 결혼식',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공효진, 김래원(이하 '가장 보통의 연애'), 박보영('너의 결혼식'), 손예진, 그리고 소지섭(이하 '지금 만나러 갑니다') 모두 영화계에서 흥행력이 검증된 배우들이며, 전작들에서 이미 입증하지 않았던가.
물론 '건축학개론'의 수지처럼 신인이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신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를 주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흥행과 수익을 우선으로 따지기 때문에 캐스팅 폭이 매우 좁은 편이다. 네임밸류가 높지 않다면, 아무리 대본이 좋아도 투자를 받아 촬영까지 이어지는데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점점 상황이 나빠져 멸종 위기로 몰리고 있지만, 다행히 멜로 영화는 계속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멜로 영화들이 지금도 꾸준히 추억되고 소비하고 있다. 또 '어바웃 타임', '이터널 선샤인' 등 해외 유명 멜로 영화들이 재개봉하고 계속 호평을 받는 건, 잘 만들기만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관객들이 관람하러 온다는 의미다.
코로나 팬데믹 등으로 개봉 일정이 대거 연기된 상황 속에서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한국 멜로 영화들도 있다. 먼저 오는 6월에는 탕웨이, 박해일 주연에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헤어질 결심'이 공개된다. 개봉하기 앞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죽어가던 멜로에 불씨를 살리고 있다.
이어 이동욱, 임수정 주연의 '싱글 인 서울'은 지난해 2월 크랭크업을 하며 개봉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또 동명 대만 영화 리메이크작으로 알려진 '말할 수 없는 비밀' 또한 지난 2월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에 돌입한 상황.
이들의 뒤를 이어 '별빛이 내린다'와 '2시의 데이트'는 4월 크랭크인 할 예정이며, 2000년 멜로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던 '동감'은 22년이 지나 리메이크작으로 재탄생한다. 여진구, 조이현, 김혜윤이 유지태, 김하늘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앞으로 공개될 작품들이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 멜로 영화를 심폐소생술로 되살려낼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