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 Hyun Oct 12. 2024

스튜디오 촬영은 42.195km 완주다

체력보다 멘탈 소모가 더 심했던 웨딩 스튜디오 촬영 후기

버진로드를 걷기까지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 웨딩 스튜디오 촬영. 결혼하게 되는 순간부터 평생 남을 인생사진으로 기억될 만큼, 예비부부들이 가장 힘주고 신경을 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커플 또한 웨딩 스튜디오 촬영에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 촬영일은 설 연휴가 막 2023년 1월 말 목요일. ㅁ부장은 그나마 젤 늦은 시간대 밖에 없다고 말해 마지막 타임인 4시 반으로 예약해 뒀다. 그러면서 스튜디오 촬영을 앞두고 예비부부들이 준비해야 할 리스트를 빼곡히 적어서 우리에게 넘겼다.


흰 양말과 웨딩슈즈 준비하기

안경은 알 없는 테만 준비할 것, 렌즈 착용할 것

수면은 충분히 취할 것

장시간 촬영으로 인한 체력보충용 간식 챙겨둘 것

촬영 시작 전에 웨딩 촬영용 슈트 찾아올 것

웨딩 촬영하기 전에 제모하기

누브라 착용할 것

머리 미리 자르고 오기

결혼반지 꼭 챙겨 올 것

헬퍼 이모에게 드릴 헬퍼비 잊지 말 것

올 때 지퍼가 달렸거나 셔츠처럼 쉽게 벗을 수 있는 편한 옷 입을 것 등등


리스트가 왜 이리 많은 거야..??


크고 작은 항목들 중에서 내가 가장 신경 쓰였던 건 렌즈 착용이다. 20년 가까이 안경만 착용해 온 반면, 렌즈 착용 경험이 전무. 당연히 렌즈 끼우고 뺐다 하는 게 익숙할 리가 있나.


우려는 현실이 됐다. 3n년 만에 처음으로 렌즈를 끼워보는 연습을 하는데, 손톱 만한 렌즈를 처음 본 눈은 적이라 인식하고 계속 깜빡거리며 접촉을 전면 거부했다. 유튜브 영상 보면서 따라 해봤지만, 내 두 눈은 여전히 철벽 쳤다. 연습 실패했으니 실전도 실패. 결국 단골 안경집을 방문해 도움 받고 가까스로 렌즈 삽입에 성공했다. 이 나이 먹고 렌즈 하나 제대로 끼우지 못하는 나란 녀석이 한심하게 느꼈던 순간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고 ㅁ부장이 말했지만, 실천할 수 없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모니터링하다 보니 새벽이 되어서야 눈을 잠깐 붙였고, 아침 일찍부터 해야 할 업무가 있어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인지 렌즈 낀 눈은 너무나 뻑뻑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새 예약한 Z 메이크업샵이 있는 압구정로데오역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펑펑 내렸던 눈은 점점 더 거세게 내렸다. 인도에 수북하게 쌓인 것은 물론이며, 길바닥이 미끌미끌해지면서 걷는 것조차 온 힘을 신경 써야 할 정도다. 차도를 달리는 차들 또한 눈 때문에 제 속력을 내지 못하고 거북이걸음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사전에 예약했던 12시에 맞춰 Z 메이크업샵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까지 왜 12시까지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 촬영은 4시 반 타임인데, 왜 4시간 이상 일찍 도착해야 하는 걸까', '신랑, 신부 메이크업을 4시간 넘게 한다고? 대체 얼마나 하길래?' 등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면서 왔다.


메이크업샵 문이 열리면서 의문점은 단번에 해결됐다. 우리 커플과 같은 날에 웨딩 스튜디오 촬영을 하는 다른 예비부부들이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웨이팅 하고 있었던 것. 나보다 먼저 도착한 J를 만났는데, 그 또한 무한 웨이팅 중이었다. 이러다 4시 반 촬영 될 때까지 메이크업을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 차례는 언제쯤 오나? 앞이 안 보여..


그보다도 스튜디오 촬영에 필요한 예복을 챙겨 와야만 했다. J의 촬영용 드레스는 헬퍼이모님이 챙겨 온다고 하지만, 나는 직접 받아와야 하는 신세였다. 2, 3주 전 J와 함께 다녀온 슈트대여점 L이 Z 메이크업샵과 도보 5분 거리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눈이 그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변수였다. 망설일 틈이 어딨어, 일단 고!


점점 굵직하게 변하는 눈송이를 뚫고 슈트대여점 L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가는 건 문제가 없었고, 촬영 때 입을 슈트 3벌과 넥타이, 기타 액세서리 세트를 챙겼다. 하지만 이걸 두 손으로 챙겨가기엔 짐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한 손으로 우산을 들어야 했고, 가는 길목에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길도 있어 복귀 코스 난이도가 급 상승했다. 이걸 어쩐담.


나가기 전, 어떻게 해야 사람 한 명이 모든 짐을 들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지 두뇌를 풀가동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기지를 발휘한다고 했던가. 위기의 순간에 무릎을 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들고 온 장우산 고리에 휴대용 슈트 케이스를 모두 걸었고, 우산을 힌 쪽 어깨와 목 틈에 끼웠다. 그러면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두 손을 활용해 넥타이와 액세서리들이 들어있는 박스를 움켜잡았다. 남들이 보기엔 상당히 불편한 자세를 유지한 채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고, 내리막길도 무사히 통과했다. 이렇게 미션 클리어다.


기다리다 지친다 내 내 내 차례 언제 오냐 증말... 기다리다 매우 지쳐... 언제 내 차례...


나의 예복 세트를 챙겨 왔지만, 웨이팅은 큰 변화가 없었다. 나를 포함해 기다리는 사람 수는 늘어났고, 메이크업샵 내 의자는 Full. 어디 하나 노는 자리 없이 모든 샵 직원들이 총동원돼 예비부부들 메이크업 완성시키는 데 총력전을 펼쳤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꾸벅꾸벅 졸았다.


바닥을 향해 헤드뱅잉을 얼마나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쯤, 누군가가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내 차례다. 정신을 차려보니 J는 이미 메이크업을 받으러 간 상태였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거울 앞 의자에 앉았다. 메이크업하기 전 머리부터 손질했다. 30분 간 열심히 꾸안꾸 스타일로 세팅을 마친 뒤, 메이크업할 차례. 메이크업 담당자분의 현란한 손놀림 속에 뽀얀 피부로 탈바꿈했다. 와 이래서 화장발이 중요하구나.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오자, 스튜디오 촬영을 도와주실 헬퍼 이모님이 J의 촬영용 드레스들을 바리바리 담아 온 캐리어를 끌고 등장했다. 헬퍼 이모님의 등장과 함께 부케도 타이밍 맞춰 메이크업샵 카운터에 도착했다. J 또한 촬영 준비를 위한 풀메이크업 세팅을 마쳤다. 볼 때마다 이뻤지만, 오늘은 더욱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파리의 연인' 박신양에 빙의해 "이 여자가 내 여자다"라고 자랑스럽게 외치고 싶었다.


시간은 어느덧 3시 반, 이제 신랑신부 촬영용 예복으로 환복 할 때다. J가 먼저 갈아입으러 갈 때쯤, ㅁ부장이 메이크업샵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제 오셨군요. 부장님^_^...


지난번 웨딩드레스 셀렉날처럼 불참하는 줄 알았네요, 부장님^^*. 입꼬리는 미소 짓고 있으나, 눈빛은 광기와 분노를 뿜어냈다. 지난번 불참사건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ㅁ부장은 "어머, 신랑님 오늘 메이크업이 잘됐네요"라고 영혼 없는 칭찬만 날렸다.


인사가 끝날 때쯤,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J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J의 미모가 너무 눈이 부셨다. 여러분, 이 사람이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촬영 준비를 마치고, 스튜디오로 출발. 도보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이긴 하나, 언덕을 넘어야 하고 눈이 많이 내리는 점을 감안해 카카오 T를 통해 밴을 불렀다. 그런데 호출받은 밴 기사아저씨, 무단횡단 하지 못하게 설치된 바리케이드 옆에 정차하고 계셨다.


이건 또 무슨 일..?


"여기 설 수 없으니까 빨리 타세요"라고 되려 역정 내는 기사아저씨. 나는 끌려가지 않고 "아저씨, 여기 서 계시면 저희가 탈 수 없어요. 제가 지정한 곳이랑 다르잖아요. 이런 식이면 이번 콜 취소하고 다른 차 부를 거예요"라고 예의 없는 기사아저씨의 귀책사유를 끄집어내며 받아쳤다. 틀린 말 없는 나의 말에 아저씨는 괜히 성질을 바득바득 내면서 천천히 후진했고, 우리 커플과 헬퍼 이모 그리고 스튜디오 촬영에 필요한 짐들까지 무사히 탑승.


5분 뒤, 우리의 장기 레이스 아니 웨딩 촬영이 진행될 M 스튜디오 앞 도착. 스튜디오 정문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밴이 도착하자마자 트렁크를 열어 일사불란하게 짐을 내려 스튜디오 내부로 옮겼다.  


나와 J, 헬퍼이모, 우리의 짐, 그리고 남자 2명이 탄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스튜디오의 실체(?)를 보고 말을 잇지 못한 내 모습


생각보다 크지 않은 지하 스튜디오 규모와 세트장별로 예비부부들이 밀어내기하듯이 촬영을 이어갔다. 대기실도 한 사람만 딱 들어가서 앉아 쉴 수 있을 정도 크기이며 한 대여섯 개? 대기실 자리가 없으면 세트장 앞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내 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스튜디오 사진 바깥 풍경은 이렇게 열악했구나.


다행히 우리 커플이 마지막 타임이다 보니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대기실 여유분이 남아있었다. 촬영 시작하기 전 한 번 더 옷매무새를 만지며 마지막 정리를 마쳤다.


첫 번째 촬영은 5층에 마련된 세트장. 정원, 창가, 그리고 갤러리 콘셉트로 이뤄진 3개 공간에서 웨딩 촬영의 정석, 그리고 모델 화보 느낌을 몇 스푼 더한 스타일로 진행했다. 언제 이런 공간에서 전문 포토그래퍼가 촬영하겠냐며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인생샷 건져보자는 마인드로 임했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사진 촬영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나를 찍는 포토그래퍼 또한 신나서 나에게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요구했다. 예비 신랑들이 스튜디오 촬영을 힘들어했다는 대다수 후기가 맞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난 촬영이 체질이 아니었을까, 하하하. 


오~ 촬영 재밌는데~! 나 체질인가 ㅎㅎ

반면, J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던 점도 있어 촬영 한 컷 한 컷 찍을 때마다 힘들어했다. 게다가 나와 다르게 갈아입어야 하는 드레스, 베일 등이 많다 보니 더더욱 예민해졌다. 이럴 때, 예비 신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예비 신랑의 역할 아니겠는가. 최대한 J가 편하게 촬영할 수 있게 실없는 드립을 쉴 틈 없이 던지거나 "내 거 중에 최고" 같은 칭찬 세례를 이어가며 북돋아줬다. 


비록 웃음 타율이 높은 건 아니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치얼업 덕분에 J도 웃고, 담당 포토그래퍼와 헬퍼 이모, 오늘 예비부부를 따라다니면서 현장에서 J의 헤어 변형 및 보완을 맡아줄 헤어 변형 담당자까지 활짝 웃었다. 좋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예비신랑, 예비신부 개인샷, 커플샷, 다양한 소품과 뒷배경을 활용한 각양각색 설정샷 등 셔터 소리는 쉴 새 없이 터졌고, 오늘 포토그래퍼가 렌즈로 담아내고 있는 두 모델은 사진작가가 요구하는 대로 최대한 맞춰서 포즈를 취했다. 부케도 들었다가 거대한 꽃다발로 교체했다가 소품도 다채롭게 활용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우리 커플의 촬영 현장을 따로 스마트폰에 담으면서 "두 분 너무 보기 좋아요", "신부님 매우 아름다우세요!", "신랑님 아주 잘하고 계세요!"라고 무한 응원을 보냈다. 헬퍼 이모님 또한 J의 베일이나 드레스 등 옷매무새를 살짝씩 만져주면서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보이셨다.


그렇게 탄생한 우리 커플 인생샷.jpg


몇 달간 지을 미소를 반나절 동안 한꺼번에 땡겨쓰려다 보니 촬영 중간중간에 얼굴 경련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버텨내야지. 이겨내야지. 일일 모델하는 데에도 이렇게 쉽지 않다는 걸 느끼는데, 항상 화보 촬영에 임하는 전문 모델들은 이걸 매일 경험하는 걸까. 역시 프로들은 다르겠지?


약 1시간 반에 걸쳐서 5층에서 진행된 1차 촬영을 마쳤다. 정확하게 세어보진 않았으나 한 3, 400컷가량 촬영한 것 같은데, 진이 빠졌다. 체력으로는 남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힘든 거였어? 2차 촬영용으로 임할 다음 예복으로 환복 하기 위해 탈의실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왔다. 다음 턱시도로 빠르게 갈아입은 나는 입고 벗기 까다로운 드레스를 환복 중인 J를 기다리며, 등받이 없는 긴 벤치에 앉아있었다. 


이때 1차 촬영 당시 보이지 않았던 ㅁ부장이 살며시 다가와서 한 마디 건넸다.


혹시 저 먼저 가봐도 괜찮으실까요, 예비 신랑님?


손목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6시가 훌쩍 넘었다. 모든 직장인에게 퇴근이 매우 중차대한 사항인 건 알고 있지만, 퇴근해도 되냐고 묻는 ㅁ부장이 왠지 모르게 괘씸하게 느껴졌다. J의 웨딩드레스 셀렉날을 망쳐놓은 것부터 메이크업샵에도 뒤늦게 나타난 점, 1차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자신의 고객을 팔로업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등 그의 업무태만 상황들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못된 걸 그냥 넘어가지 않는 내 성질머리대로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불편한 상황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아하는 J를 생각해 꾹 참았다.


이럴 거면 왜 온 건지... 어이가 없네...?



아 네,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_^+


'네네 퇴근하세요,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 없더라고요.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저희끼리 알아서 할게요'라는 숨은 뜻까지 담아서 답변했다. ㅁ부장이 이것까지 파악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비 신랑의 허락을 받은 ㅁ부장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M 스튜디오 현장을 빠져나갔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J가 2번째 드레스로 갈아입으면서 2차 촬영 시작. 이번에는 지하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우리가 촬영 시작할 때쯤에는 다른 예비부부들이 스튜디오 촬영을 마치고 나간 뒤여서 쫓기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나이스!


2차 촬영 또한 정석과 컨셉추얼 혼합으로 진행됐던 1차 촬영의 연장선상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꽃다발 대신 의자나 사다리 등 좀 더 다양해진 소품 활용, 진한 멜로 느낌을 몇 스푼 더한 클로즈업 샷 등 과감하고 색다른 콘셉트가 많아졌달까. 


앞선 촬영을 통해 어색함이나 긴장이 풀렸던 터라 2차 촬영은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촬영으로 어색해했던 J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면서 재미를 붙여나갔다. 스튜디오 촬영에 재미 붙은 두 남녀의 텐션에 포토그래퍼 또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촬영을 리드했다.  


아까보다 한결 편해졌다곤 하더라도, 결혼 때문에 스튜디오 촬영을 처음 하는 일반인들에겐 장시간 촬영이 매우 고됐다. 특히나 저녁도 먹을 시간도 없이 진행되는 탓에 체력은 빨리 고갈되고 있었다. 촬영을 극도로 신경 쓰다 보니 입맛도 없었고, 전날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더니 피로감이 평소보다 몇 곱절로 다가왔다. 간단하게 챙겨 온 간식들(초콜릿, 과자, 사탕 등)을 틈틈이 섭취하며 간신히 버텼다. 지금부터는 정신력 싸움이다.


꺾이지 않는다, 이겨내 이겨내!


시침과 분침은 계속 돌아가는데, 사진작가님의 예술혼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는지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은 딱딱하게 굳어가는 느낌이었고,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콘택트렌즈를 처음 착용한 부작용인지 두 눈이 매우 뻑뻑하고 침침했다. 심경은 마라톤 코스를 한 3/4 이상을 소화한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뛰면 골인지점이 보일 것 같은데, 마음 한 편에선 쉬고 싶다는 감정이 생기면서 점점 페이스가 떨어지는 그 기분이랄까. J는 나보다 더 힘들어했다. 움직이기 불편한 촬영용 드레스와 하이힐을 장시간 동안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잘 알기에 힘든 기색을 내지 않고, 옆에서 최대한 J를 서포트하면서 "좀만 더 하면 끝날 거야. 힘내자"고 격려했다. 헤어 변형 담당자도 뒤에서 우리를 촬영해 주면서 "사진 잘 나왔어요", "이쁘세요"라고 응원해 줬다. 오늘 처음 뵀는데, ㅁ부장보다 백만 배 나았다.


2시간 이상 소요한 끝에 2차 촬영이 마무리됐다. 둘 다 탈의실에 들어가서 다른 예복으로 한 번 더 갈아입었다. 대망의 라스트 촬영을 위해서다. 이제 끝이 보인다. 골인 지점이 서서히 눈앞에 보이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


자~ 이제 마지막 촬영이다!


라스트 촬영은 서울 강남 도심 뷰를 배경으로 한 루프탑 콘셉트다. 우리가 샘플로 봤던 촬영본은 해질녘이었으나, 촬영을 늦게 시작한 관계로 어두컴컴한 나이트뷰가 됐지만, 강남의 현란한 조명들도 꽤나 괜찮아서 배경은 크게 상관없었다. 다만, 문제는 기온. 해가 떨어진 겨울밤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춥지 않던가. 매서운 추위를 얇은 예복으로 견딜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루프탑 촬영을 위해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루프탑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서늘한 냉기가 스튜디오 내부로 들어와 온몸을 구석구석 찔렀다. 어서와, 겨울밤 야외 촬영은 처음이지? 문 밖을 나서자마자, 허연 입김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하필이면 이 시간대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였다. 난방 실드 하나 없이 맨몸으로 겨울밤과 부딪쳐보니 군 생활 경험했던 혹한기 훈련이 따로 없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오픈 숄더 드레스인 J는 더욱 심하게 추위를 느꼈다. 이 콘셉트를 포기할까 말까 내적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포토그래퍼는 추위에 벌벌 떠는 예비부부를 향해 "얼마 안 걸려요. 5분도 안 돼서 끝납니다. 빨리 할게요!"라고 살살 달랬다. 금방 끝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토그래퍼는 다른 때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촬영에 임했고, 우리 커플은 빨리 촬영을 마치고 들어가자는 마음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며 그의 리드에 따라 표정과 포즈를 취했다. 


포토그래퍼의 공약대로 5분 만에 20컷을 촬영하며 5시간에 달하는 스튜디오 촬영을 마쳤다. 42.195km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는 사진작가의 한 마디에 힘이 쫙 풀렸다. 촬영 준비 4시간 30분, 촬영 5시간 도합 9시 30분에 거쳐 마라톤을 완주했다.


웨딩 스튜디오 촬영, 끄으으으으읕!!!!


재빠르게 환복을 마친 뒤, 촬영 내내 팔로업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고 J를 도왔던 헬퍼 이모에게 일당 20만 원을 건네며 고생 많으셨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열정을 불태운 포토그래퍼에게도 인사드리면서 2주 뒤에 스튜디오 촬영본 확인하는 것으로 예약했다.


M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뒤, 다음 단계는 예복 반납. J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헬퍼 이모가 수거한 반면, 나는 셀프 반납. 늦은 밤 언덕에 덥수룩하게 쌓인 하얀 눈을 해치고 L 대여점 정문 앞에 놓인 옷 수거함에 오늘 입었던 예복들을 걸어놓고 나왔다. 이제 진짜진짜 끝이다! 반납하고 나오는 길에 피로감과 수면 부족은 정점을 찍었다. 중요 일정이 끝나면서 긴장감이 싹 풀리니 이 녀석들이 어깨 양 옆에 붙어버린 것이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J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고생 많았다고 격려했다. 이제 집에 가서 눈 붙이고 푹 자자. 너도 나도 오늘 고생 많았어.


새하얗게.. 불태웠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