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 Hyun Dec 30. 2023

웨딩플래너가 있었는데요 없습니다?!

웨딩플래너 없이 신부 혼자 드레스 셀렉하게 된 썰 풉니다

결혼 준비하면서 신부들이 극도로 예민해지게 되는 기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드레스 투어다. 평균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5~6개월 전에 결혼식 당일에 입을 드레스, 그리고 웨딩 스튜디오 촬영 때 입을 드레스를 입을 샵을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샵을 선택한 뒤에 나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혹은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계속 찾아야 하는데 이게 예비신부들의 에너지를 엄청 소모하게 만든다. 


1년 전부터 결혼 준비를 하는 다른 커플들과 달리 우리는 6개월 전부터 뒤늦게 뛰어들었기에 남들보다도 신속하게 해치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파워 J형인 J는 자신의 양 두뇌를 풀가동하며 수 천 벌의 웨딩드레스를 보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좋아하는 디자인이 나오기까지 고르고 골랐다. 


"이거 어때?"라면서 나한테도 꾸준히 공유해 줬고, 덕분에(?) 드레스 보는 눈이 덩달아 생겼다. 남자들은 웬만하면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즈와 실크 드레스 재질 차이점부터 벨라인, 머메이드 등 드레스 디자인, 베일 종류, 비즈와 실크 혼합률이 어느 정도 되는지 등을 파악할 줄 알게 됐다. 워낙 디테일하게 캐치하는 성격이 한몫했다. 후훗.


사진 속 드레스별 차이점을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남자들은 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엣헴.


이는 웨딩플래너 ㅁ부장과의 첫 만남 전에 일찌감치 원하는 샵 3군데를 마음속에 픽해두는 경지에 다다랐다. J가 고른 샵 리스트들을 살펴본 ㅁ부장은 놀라면서 이와 같이 말을 건넸다.


신부님이 고르신 샵들의 가격이 꽤 나가는 곳이네요..^_^

뭐지? 이게 왜 비싼 건데? 가격표를 보여줘봐요


사실 그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저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견적서에 '+00만' 나 '-00만' 식으로 표기된 것만으로 샵별 가격 차이가 있다는 게 인지했을 뿐이다. ㅁ부장은 J픽 중 하나인 ㄱ샵을 보며 드레스 실물이 별로라며 차라리 여기가 어떻냐며 다른 곳 5군데 후보를 추천해 줬다. 


추천받자마자 J는 다섯 후보군의 SNS 계정 및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드레스 디자인 A부터 Z까지 꼼꼼하게 훑어봤다. 그녀에게 딱히 마음에 드는 구석은 없어 보였다. 


이를 본 ㅁ부장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샵 리스트들을 추천했다. 이 좁디좁은 나라에 드레스샵이 이렇게 많이 있는지를 처음 알았다. 분명 하루 만에 살펴볼 수 없는 목록들인데도 J는 이걸 해냈다. 그나마 자신의 취향의 드레스 디자인을 소량으로 보유한 ㄴ샵으로 변경했다. 어렵게 타협점을 찾은 셈이다.


웨딩샵 3곳을 고른 뒤, ㅁ부장과 함께 드레스 투어 일정을 조율하던 J. 나와 전혀 상의하지 않고 12월 어느 금요일 오후에 도는 것으로 픽스했다. 왜 혼자서 결정했는지 물었는데, J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리 안 보여주고 나중에 스튜디오 촬영할 때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려구 ㅎㅅㅎ

찾아봤더니 미국식은 결혼식 당일 전까지 신부 드레스를 볼 수 없다고 하더라


예비 신랑 신부가 같이 드레스 투어를 도는 게 일반적이긴 한데, 우리는 조금 달랐다. J는 한국식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미국식을 선호했다. 미국 전통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식날 버진로드에 행진해 신부를 맞이하기 전까지 신부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안 본다고 하더라. 예고 없었던 서프라이즈 이벤트 덕분에 호기심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과연 J가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상상하면서 말이다.


12월 어느 금요일 오후, J의 드레스 투어날.


J는 동생, 그리고 ㅁ부장과 함께 드레스 투어를 했다. 나는 일터에서 일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J가 어떤 드레스를 골랐을까,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등등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궁금증과 불안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날 내가 해야 할 업무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았고, 대충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다. J에게서 카톡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J한테서 카톡 올 때쯤 됐는데... 왜 안 와? 


몇 시간 뒤, 카톡 알람이 울렸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J의 카톡이었다. 다행히 드레스 투어를 잘 마쳤다고 말했다. 투어 다녀온 웨딩드레스샵 세 곳 중에서 A샵이 좀 더 마음에 드는 드레스 디자인들이 있어 그곳을 선택했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자신이 입었던 A샵 드레스 몇 개를 보여줬는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뿐인 내 여친은 언제나 이뻤지만, 드레스를 입은 자태를 보고 훨씬 더 이뻤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A샵으로 픽한 뒤, 스튜디오 촬영용 드레스를 고르는 날짜도 정했다. 1월 XX일 토요일 오후. 같이 따라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이날 사촌 결혼식이 잡혀있었다.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J는 동생과 같이 고르면 되기에 문제없다고 당차게 답했다. 1월 말에 예정된 스튜디오 촬영 전까지 J가 입을 드레스를 볼 수 없다니, 볼 수 없다니..!!!




1월 XX일, 토요일. J의 스튜디오 촬영용 드레스 고르는 날.


사촌 결혼식에서 축의금 대신 걷어주고, 오랜만에 친척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안부 물으면서 대화하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나서 바깥이 어둑어둑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J의 드레스 고르기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J의 목소리는 잔뜩 신났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힘이 없었다. J의 목소리가 힘이 없는 이유는 금방 알게 됐다.


오늘 웨딩플래너 없이 드레스 셀렉을 하게 됐는데, 고른 드레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건 무슨 소리지? 웨딩플래너는 온데간데없고 왜 J 자매 둘이서 A샵에 가서 드레스를 골랐다는 것이지?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A샵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웨딩드레스샵을 방문하기 전날, ㅁ부장이 J에게 갠톡으로 연락 왔다. 드레스 셀렉하러 가는 날이 하필이면 자신의 다른 고객의 결혼식날과 겹쳤다는 것. 그래서 다른 날짜로 조정 가능하냐고 J에게 연락 온 것인데, ㅁ부장이 요청한 다른 날짜는 평일인 데다가 신혼여행에 거의 모든 연차를 소진한 J 입장에선 무리하게 연차를 추가로 쓰기 힘든 상황이었다. 


J는 ㅁ부장의 상황을 양해하면서 다른 고객의 결혼식장을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동생과 둘이서 가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J자매 둘이서 손잡고 A샵을 방문하게 됐는데, A샵 직원들의 태도가 두 자매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J자매가 원하는 디자인에 맞는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으나, A샵 직원들은 고객의 의견을 반영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켜 자기네들의 추천픽으로 J에게 권하고 입어보라고 한 것. J가 "이건 좀.." 의견을 피력하면, A샵 직원들이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수군거리기까지 했단다. 결국 A샵 직원들의 불쾌한 애티듀드 때문에 J는 꺾였고, 자신이 원하는 드레스를 제대로 입어보지 못해 상심하게 된 것이었다. J가 푸대접을 받은 뒤에도, ㅁ부장은 예비신부가 드레스를 잘 골랐는지 전혀 묻지도 않았다.


나의 분노가 미친 듯이 타오른다!


몇 시간 사이에 J가 겪은 스토리를 듣고 나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ㅁ부장의 행동이었다. 자신의 다른 고객을 챙기는 반면, 우리 커플을 방치하는 태도가 싫었다. 아무리 J가 허락했더라도 드레스 셀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이 혼란을 겪지 않게 회사 내 다른 플래너를 보내는 등 대처 또한 전혀 없었다. 


ㅁ부장이 방치한 덕분에 J는 A샵 직원들에게 무시당했고, 예비 신부가 만족해야 할 드레스가 아닌 다른 드레스를 고르게 됐다. 이러려고 적지 않은 돈으로 계약하면서 웨딩플래너를 고용한 게 아닌데 말이다. 나는 당장 ㅁ부장에게 따지겠다고 갈갈이 날뛰었고, J는 그러면 안 된다며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나를 뜯어말렸다.


직접 따지는 대신, ㅁ부장의 프로답지 못한 태도를 폭로하는 글을 내가 가입한 결혼 준비 카페에 업로드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커플과 비슷하게 당한 케이스가 심심찮게 보였고, 동의하고 위로하는 글들이 많았다. 이럴 거면 웨딩플래너가 왜 존재하는지 의구심까지 들었다. 돈도 아깝고, 기분도 심히 불쾌했다. 




다음날 J는 자신이 당했던 불쾌한 경험을 일일이 공개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없어 한 번 더 봐야겠다고 ㅁ부장에게 이야기했다.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지 않으려는 평화주의적(?)인 선택이었다. 2주 뒤, 평일 오전에 시간을 내어 A샵을 재방문하는 것으로 잡아뒀다. 이번에는 나도 따라갔다. 예비신부가 곤란한 상황에 겪지 않게 하려는 차원에서 동행했다.


우리 커플은 약속된 시간에 맞춰 A샵을 방문했다. 예비 신랑신부가 온 걸 확인한 A샵 직원은 우리를 피팅룸으로 안내했다. J가 첫 드레스로 환복하고 나서야 ㅁ부장이 도착했다. 이렇게 제시간에 맞춰 오지 않았는데, 내가 참여하지 않았던 드레스투어 때는 얼마나 심했을까 하는 부정적인 상상만 샘솟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무 문제 없이 드레스를 골랐습니다 


다행히 이번 셀렉에선 아무 문제는 없었다. 드레스 5,6 벌을 추가로 입어본 J는 스튜디오 촬영용으로 입을 드레스를 최종으로 고르면서 이전보다 만족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A샵 직원들의 수군거림과 무시는 없었고, ㅁ부장은 "드레스 예뻐요!"라고 J의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이렇게 드레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미 ㅁ부장을 향한 신뢰도는 훅 떨어졌다. 이제 와서 열심히 리액션한다고 우리의 불쾌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녹는 것도 아니니까.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 커플이 고용한 웨딩플래너의 위대한(?) 족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결혼식 당일까지 이어졌다. 

이전 08화 프로여행러의 신혼여행 코스 짜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