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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랑 May 06. 2023

글이 오르는 식탁(識卓)

음식은 됐어요

 지역으로 온 지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새로운 직업에 적응하랴 수행하랴 반성하랴,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 듯 지나가는 시간 속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 와중에 이사까지 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낯선 곳에서 집을 구하고 공간을 꾸리기까지, 대신해 줄 누군가는 없다. 오롯이 나 혼자 이뤄가야 한다. 돈이 많았다면 수월했을까. 하지만 나는 돈도 시간도 없기에 바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손바닥만 한 수첩에 적힌 해야'만' 하는 것을 하나씩 해치우며. 목록을 지워가는 그만의 재미(?)가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기다리고 있는 다음 순서에 “오늘 진짜 길다“라고 하찮은 체력에 귀찮음이 (조금) 더해진 진심을 막을 수 없으니.


 아직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았지만 대부분 지워진 지금, 나는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무언가 남겨야겠다고 단번에 꺼내 든 노트북이 참 오랜만이다. 두 달 동안 임시로 썼던 방은 뭐랄까.... 내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의 것'을 하고 싶은 욕구가 전혀 들지 않았다. 언제 이동할지 몰라 짊어지고 온 짐을 풀지 않고 최소한의 물건만 꺼내 썼으니 무엇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핑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말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서울 옥탑방에서 살 때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은 1년 만에 통근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전까지 다신 나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서울이 아닌 곳에서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 뿌듯하다. 비록 사무실에서 모자란 능력치에 머리를 쥐어뜯는 괴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생긴 나의 공간에 꾸리고 싶었던 것은 거실에 티비 대신 큰 식탁을 두는 것. 눈치 볼 필요 없이 내가 읽은 책들을 마구마구 쌓아 둔 식탁. 요즘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그런 식탁. 그런 식탁이 거실 한가운데 우둑커니 놓여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그것들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물건 욕심이 없는 나지만 어떤 것보다 식탁에 애정을 쏟았다. 오래오래 나와 같이 갈 물건으로.   


 짐이 많은 것을 안 좋아해 꼭 필요한 것만 들이다 보니 거실에는 식탁뿐이다. 썰렁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필요한 것이 없는 걸 어쩌겠나. 사방이 꽉 막혀 속 시끄러운 것보다 비워진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훨씬 좋다. 여백이 많은 공간은 고요하지 않다. 가리는 건물 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창문 밖으로 비에 젖은 바퀴 굴러가는 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 어린이날을 맞이해 오전부터 바쁜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운 소리가 나의 공간과 잘 어우러진다. 몇 년 전 집 같지 않은 곳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튼튼하고 넓은 식탁 위에 '가족을 폐지하라' 책과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긴 간결한 정신이어야 가볍게 멀리까지 갈 수 있다(커피와 담배, 정은)'가 적힌 공책이 있다. '간결한 정신으로 지식, 실천, 장소를 근거하는 근족을 만들자', 두 가지가 오묘하게 짝꿍이 된다. 아직 식탁 위에 쌓인 것이 얼마 되지 않지만 말해주는 것은 크다. 역시 식탁 들이길 잘했다는 생각.

 

 남들이 말하는 성공은 잘 모르겠고 내가 그려왔던 모습을 실현시킨 것으로 충분하다. 출, 퇴근 길이 20분을 넘지 않아 아침, 저녁 시간을 내 공간에서 보낼 수 있는 것. 뭐든 가까운 것이 좋다는 어른들 말이 백번 맞다.

 하나씩 나에게 얹히는 것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유지할지 고민된다. 하지만 이뤄낸 것을 보고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 의미로 동력을 만드는 나의 식탁(識卓)이 요즘 참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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