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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커피 씨앗은 맛있는 커피가 되기엔 한없이 부족하다. 밥 짓기 전까지 생쌀이 가진 향미나 질감을 알 수 없듯, 커피 생두도 풋내 가득한 한낱 씨앗에 불과해 그 자체로 향이나 맛을 표현할 수 없다. 길 어귀에 널브러진 이름 모를 씨앗들과 다를 바 없는 낱알들은 불을 이용한 로스팅이라는 가공을 거치면 여느 씨앗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향미를 뿜어낸다. 누가, 언제부터 이 씨앗들을 볶아내고 검붉은 액체로 만들어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커피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인 건 확실해 보인다. 보통은 열매를 먹거나 씨앗을 다시 심어, 또 열매를 수확할 생각으로 씨앗을 대할 만한데 볶아서 먹을 생각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고, 볶았을 때 넘쳐나는 향미도 신기하다. 커피를 발견하고 자라온 시간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향미를 가지게 된 이 씨앗들은 서로 간에 다른 향미로 그들만의 개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로스팅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커피로 인식되고 그들만의 매력으로 기호가 생겨나기도 한다.
커피를 가공하면 가공하는 정도에 따라 볶음도가 생긴다. 단어 자체가 ‘볶는 정도’를 줄여 사용했는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모르겠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이 습관이 표준어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익숙해져 버린 단어가 되었다. 근래에는 볶음도라는 단어보다는 로스팅 레벨이나 로스팅 단계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하지만, 저마다 이를 정하는 기준이 달라 색도계라는 장비로 원두의 색을 판별해 볶음도의 기준을 정하는 아그트론(Agtron) 방식을 많이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색 구분이 맛있고, 맛없고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단지 로스팅 후 가공된 원두의 결과물이 내가 원하는 정도까지 작업이 되었는지, 어제의 결과물과 오늘의 결과물, 그리고 내일의 결과물까지, 내 기준안에서 허용되는 오차범위를 파악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약 볶음, 중 볶음, 강 볶음.
약 볶음도 그 안에서 아주 약한 단계가 있을 것이며, 조금 더 강한 약 볶음이 생겨난다. 중 볶음이나 강 볶음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볶는 정도에 따라 같은 커피라도 그 맛은 전혀 다른 커피로 느껴질 정도로 향미에 큰 영향을 준다. 약 볶음은 주로 신맛과 단맛을 가지고 있으며, 중 볶음은 신맛, 단맛, 쓴맛의 균형감이 좋다. 강 볶음은 단맛과 쓴맛이 강하다. 예를 들어 에티오피아 내추럴 계열의 어느 커피 하나를 정해 약, 중, 강으로 가공 후 향미 평가를 해보면, 약 볶음은 꽃 향이나 베리류, 자두, 복숭아 등 주로 과일이나 열매와 같은 향들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강 볶음은 약 볶음에서 느껴졌던 과일 향이나 꽃 향은 온데간데없고 그와는 전혀 다른 초콜릿 향이나 코코아, 흑설탕, 바게트와 같은 향으로 변한다. 중 볶음은 이들 사이에서 균형감을 중시하는 볶음도 중 하나다. 토스트나 졸인 시럽, 캐러멜과 같은 단맛과 고소한 단내가 많은 편이다. 이러한 볶음도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기호의 선택이지 절대적이지 않기도 하며, 커피를 로스팅하는 가게들 마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어 어느 하나의 조건을 표준이라 하기도 어렵다. 나 자신이 맛있게 마실 수 있다면 그게 전부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커피 추출을 잘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또는 커피를 보다 더 맛있게 즐기고 싶은 욕심, 그리고 커피를 판매하는 어느 누군가는 다양하게 변하는 향미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추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볶음도에 따라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어 어려울 것 같지만 맛의 흐름만 잘 파악한다면 그리 어렵지도 않다. 향으로 가득 채워진 커피에서 향을 배제한 체 맛 하나로 추출 상태를 파악하고 수정한다는 게 이상한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맛을 잡지 못한 채 향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향들이 너무 많다. 향을 알아야 잔 안에 배어있는 향으로 그 커피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긋난 내 기억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향과 다르게 그 수가 제한적이고 단순한 맛은 누구나 쉽게 판단하고 접근할 수 있다.
글 더하기. 아그트론(Agtron)
아그트론 컬러는 아그트론 회사에서 만든 장비로 측정한 값을 말한다. 적외선으로 원두나 분쇄한 커피 가루에서 나오는 색의 파장을 측정하는 장치로 꽤나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 SCA는 여기에서 나오는 컬러 값을 기준으로 볶음도를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대형 공장이 아닌 개인이나 중, 소규모 로스터리 가게 또는 공장에서 사용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이 때문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색도계가 많이 나오고 있으며, 가격도 많이 낮아진 상태다. 하지만 그 형태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원두 색을 측정하기보다는 원두 표면에 반사된 빛을 측정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가공된 원두나 분쇄한 커피 가루를 정해진 틀 안에 반듯하게 담아 측정 장비에 맞물리면, 암실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 쏴 돌아오는 빛의 양을 측정한다. 원두 색이 밝으면 밝을수록 반사율은 높아지고 어두워질수록 반사율은 적다. 제일 밝은 #95번부터 10단위로 줄어들어 제일 어두운 #25번까지 구분되어 있어 집 집마다 서로 다른 기준들을 어느 정도 표준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며, 내가 작업한 결과물의 오차 범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어두운 공간 어느 한 곳에서 나온 빛으로 측정하기에 틀 안에 담은 원두나 커피 가루가 반듯하지 않아도 반사율은 조금씩 다르게 나오며, 빛을 받은 면이 은피가 많거나 커피 오일이 묻어나는 원두인 경우에도 다르게 측정되어 생각지도 못한 볶음도가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