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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필 Sep 25. 2018

유시민 - 나의 한국 현대사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행위가 민족적 배신이었다거나, 낙화암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의자왕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기 위해 신라의 권력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라거나,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으로 지금 민주화를 누리고 있다거나, 남북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빨갱이였다거나,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우리나라를 환경선진국으로 발돋움시킨 쾌거였다고 말한다면 술자리에서 격한 주먹다짐이 벌어질 수 있다.

그만큼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우리의 역사전쟁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다.

하나는 5.16과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그들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 종편방송 신문사주, 법원, 검찰, 군대, 경찰 ..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


또 하나는 4.19 5.18과 민주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종북좌파라고 이들을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으며 민주화 시대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그 10년에 대해 깊은 불만과 짙은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국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그렇자면 이 두세력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산업화와 민주화는 우리의 과거이기에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제 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1959년의 대한민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광복 14년, 정부수립 11년,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겨우 6년이었다.

2014년을 기준으로 17년 전 IMF경제위기, 명박산성, 전직대통령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던 일제의 억압과 착취, 해방공간의 혼란, 한국전쟁은 여전히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1959년은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였다.

인구는 2,400만 명, 해마다 100만 명씩 아기가 태어나 인구증가률은 3%가 넘었다.

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1인당 GDP는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고 필리핀, 태국이 우리보다 두 배 더 부유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태풍사라때문에 사망,실종자는 849명, 이재민은 40만명에 이르렀으며 태풍의 진로와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2014년은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었다.

1959년과 비교했을 때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셈이다.

인구는 5천만 명, 한해 신생아 수는 40~50만 명 사이를 유지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81달러에서 2만6천 달러가 되었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초가집에서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은 결코 아니다.

산업화 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대한 민국을 양극화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서민들은 빈곤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비 정규직 제도는 합법화 되었고 늘 직장인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대기업들은 골목시장을 장악하려 하고 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이미 상당히 벌어져있다.

우리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매우 균질하며 중앙집권 정치체제에 익숙한 민족이다.

상이한 인종, 종교를 가진 나라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다.

이슬람권과 달리 종교와 세속권력이 결합해 변화와 혁식을 봉쇄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금모으기운동처럼 공동의 사회적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를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제2장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유시민 인생에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던 기간은 겨우 아홉달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미주의와 반공주의를 이용해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고 떠났다.

유시민은 조선과 중국을 오가며 무장투쟁을 벌였던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 이봉창 의사를 높이 숭앙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12년 장기집권으로 독재와 부패,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시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지만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의미 없는 외교활동을 하다가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미국,소련, 영국, 중국이 대한민국을 신탁통치할 것을 합의하자 그는 38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다음 38선을 깨버리고 북조선을 차지하겠노라고 공언했다.

이는 분당을 기정 사실화하고 남한단독정부의 권력을 차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한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승만은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 경기를 위해 일본과의 본선경기를 치뤄야 했던 한국은 일본인이 우리 땅에 발들여놓게 할 수 없다하여 몰수패를 당할 뻔하엿다.

다행히 축구계인사들이 두경기 모두 일본에서 할 수 있게 애원하여 도쿄에서 2경기 모두 치를 수 있게 되었고 1승1무로 본선에 진출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일본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고 판사,검사,공무원,교사,지식인,경제인들은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를 추적하고 체포하려고 고문한 일제감정기 특고형사인 노덕술을 구하려고 국회를 짓밟은 사례도 있다.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는 남쪽에는 자주성이 결여되어있다는 식의 언급을 하였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후에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음모는 실패하였고 이후 군중 수백명이 시위를 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미완성의 혁명 4.19

국민들은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효율성은 당장 어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다.

그것이 4.19혁명을 통해 드러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어 또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경쟁자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지병으로 죽자 부통령 선거가 중요해졌다.

4년전 민주당 장면후보가 자유당 이기붕후보를 이겼었기 때문이다.

연로한 이승만이 죽는다면 장면 부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만큼 자유당은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조직까지 총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선거운동을 방해했고 3인조, 5인조로 함께 투표하면서 누구를 찍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물론 이기붕에게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너무 부정선거를 열심히 한 탓에 이기붕 득표율이 100%에 육박했고 후에 긴급히 79%로 조정했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눈에서 뒤통수를 관통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시민들은 더욱 격분했고 미국대사와 장관들의 권유와 대학교수들의 시위참여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4.19혁명은 미완성 혁명이었다.

독재자를 하야시키고 새 정부를 세웠지만 민주당과 시민들은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장면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못한채 군사정변에 무너졌다. 


성공한 쿠테타 5.16


1961년 5월 16일,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시설을 점령했다.

혁명 공약의 핵심은 2가지 였다.

첫 번째는 국가 자립경제 재건을 통한 민생고 해결, 두 번째는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은 박정희 대통령의 진심이었겠지만 병역복귀의 공략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와 지방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시켰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박정희는 병영복귀 공약을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으로 출마해 제 5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7년 제 6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고 1971년에는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10월에는 또 다시 쿠테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다음 9번의 긴급조치로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출발해 100% 찬성으로 8,9대 대통령이 되었다

.

박정희는 1917년 11월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2녀 5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며 책을 많이 읽어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군인을 숭배했다.

1937년부터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였던 그는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만주구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2기생으로 입고해 1942년 수석졸업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창씨개명을 하는 사람들은 흔했지만 박정희 처럼 두번이나 창씨개명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여 장교가 된 그는 일본을 위해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싸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농업사회를 중화학공업사회로 탈바꿈 시켰고 고속도로,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박정희를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손꼽는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쿠테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이라고 유시민은 추측했다. 


북한만큼만, 필리핀만큼만... 일본만큼만.


제 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어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반신반인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민생이 파탄에 빠지고 국민경제가 성장동력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정글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면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림의 녹색선을 비행기라고 보자면 박정희 대통령은 비행기를 무사히 이륙시켰다.

가파른 상승은 1997년 IMF와 함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끝났고, 이후  취임한 진보정권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이전과 비슷한 상승세로 경제성장률을 이어나갔다.

1979년 불황과 IMF, 2008년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결국 경제성장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한국형 경제성장의 비결

1959년 대한민국에는 노동력만 있었고 자본과 생산기술은 없었다.

장면 정부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발전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계획발표와 함께 급작스럽게 일어난 쿠테타에 이 과제를 완성하지 못하게된다.

우리나라는 생산이 소비를 충족하지 못해 외국의 원조를 받아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는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고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가 파견되었다.

결과적으로 외화 획득에는 큰 도움이 되긴 했다.

한국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게 직접 나누어주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사실상 섬에 가까운 대한민국의 지리적 현실



제4장 한국형 민주화,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있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으며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추운 대한민국은 바다와 철책에 둘러싸인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동국처럼 무장투쟁기지를 인접국가에 만들 수 없으며 중국, 베트남처럼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의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일이나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정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이는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투쟁방식이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투쟁이 끝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 반국가 단체 조직사건임을 발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들을 세뇌한다.

하지만 시위가 겉잡을 수 없이 과열되면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한다.

그렇게 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4.19혁명 때처럼 계엄군 수뇌부가 진압을 거부하거나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더 큰일이 벌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유시민과 학생들은 기뻐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래도 사람이 죽은 거잖아” 라고 말씀하셨다.

독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기뻐하는 것은 왠지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일그러진 시대였고 그의 마음도 그렇게 일그러져 있었다.

자유는 찾아올 것 같았지만 이내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일, 21살의 생일을 앞둔 유시민은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군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 미래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시위는 실패했고 결국 전두환은 정권을 장악하였고

얼마 후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전남대 앞에서 오전부터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이 무참히 짓밟히자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전체가 궐기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보 ‘작정상황일지’에 기록된 5월 21일으로 특전사가 전남도청에서

발포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위가 번지지 않도록 도시밖으로 나가는 길목을 모두 차단했고 외부와의 통신도 두절시켰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전사 3개여단, 보병 20사단 등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에 투입했다.

65명이 행방불명되고 166명이 사망했다.

항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대의 전두환 대통령은 운동가들에게 절대악의 화신이었다.

광주학살의 배후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을 중시한 청년지식인들은 민족해방노선으로 집결했다.

그들은 미국제국주의를 사회악으로 간주했으며 타국의 간섭 없이 민주화와 사회정의, 통일을 이룰 것을 다짐했다.

노동자들의 의식과 노동조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부는 줄곧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해산시키기도 했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은 회사에 맞서 파업투쟁을 했다.

다른 재벌총수들과는 달리 김우중회장은 직접 농성 대표자와 협상을 했으며 그들이 징역을 살고 나오자 복직시켜

유럽 각국으로 내보냈다.

재벌총수 중에 이렇게 한 사람은 김우중 회장밖에 없었다. 



6월 항쟁


전두환이 임기 후에도 계속 정권을 장악하려하자 1987년 6월, 말 그대로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명의 시민이 참여했고 4천여명이 연행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했지만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26일에는 총18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시위에 나섰다.

광주시민들은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며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시민이 시위에 참여했다.

6월의 민주항쟁은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결코 깨끗한 선거가 아니였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고 여당은 공무원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돈을 뿌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걷어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결국 김영삼, 김대중으로 분열된 2김은 노태우대통령에게 패배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지금까지도 끝없는 형태로 변화해왔다.

탄핵과 쇠고기파동,명박산성,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 등에 관하여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간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있다.




제 5장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대한민국은 지구촌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1960년 피라미드 형태였던 인구구조가 2014년에는 항아리 모양으로 바뀌었다.

인구감소는 나쁜 일인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지구촌 전체를 보든 대한민국만 보든, 인구가 줄어드는 게 오히려 바람직하다.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도 ‘희소성’과 ‘지불 능력’이라는 경제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사람을 귀하게 대접할 수 있는 물질적 능력이 없는 경우에도 그렇다.

산업화의 성공과 저출산 현상은 사람의 희소성을 높였다.

돈이 많고 자손이 귀하면 당연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존엄성도 존중한다.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존중한다.

출산율 저하현상은 대한민국이 다양성의 광장으로 진화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전태일, 문송면, 반올림

전태일 열사는 열일곱 살에 청계천 평화시장 옷 공장의 ‘시다’(재단보조)로 노동을 시작했다.

자신은 기술을 익혀 월급이 제법 많은 재단사가 되었지만, 그곳에서 강제노동과 다름없는 혹사를 당하고 각종 직업병에 시달리면서

시들어가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기 위해 혼자 근로 기준법을 공부했다.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여서 한자투성이의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기에 대학을 다녀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했다.

‘바보회’라는 노동자 모임을 만들어 여성과 어린아이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했지만 결국 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들은 100원도 되지 않는 일당을 받고 하루 16살씩 일했고 위장병, 폐렴 등에 시달렸다.

전태일은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건강진단과 월급50%를 인상하는 편지를 박정희에게 보냈다.

1970년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다.

그의 분신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은 평화시장으로 달려와 애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많은 대학생들은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전태일의 죽음에 용기를 얻은 노동자들은 자조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황유미 씨는 근무 2년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7년 숨졌다.

이 공장에서는 2000년 이후 최소 여섯 명의 백혈병 환자가 생겼고 다른 공장에서도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근로복지공단은 그들의 산재신청 승인을 거부했다.

황유미씨 사건으로 출발했던 대책위원회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올림에 직업병으로 제보를 해온 사람은 2013년까지 모두 171명이었고 그 중 70여 명이 세상을 떠났다.

많은 단체의 후회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황에서 뒤늦게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6장 남북관계 70년: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포


레드 콤플렉스라는 말을 아는가?

우리 국민의 정서와 의식 밑바닥에는 분단과 전쟁이 쓰라린 경험이, 남북한의 이념적, 군사적 대결이 빚어낸 두려움이 무겁게 깔려 있다.

북한은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무장병력을 보내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으며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하면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분단 이후 70년 동안 침략과 도발보다 더 무서운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그것은 북한을 편드는 배신자로 몰리는 것이다.

경찰청 대공과, 기무사, 공안부, 국정원과 산하기관이 누군가를 북한 편으로 지목하는 순간, 그 사람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가 된다.

한패로 몰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심지어 가족과 일가친척도 등을 돌린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의 극단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5,000여명이 이유 없이 소리소문 없이 죽어 땅에 묻혔다.

오늘날도 정부와 공안기관은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공산당’, ‘빨갱이’ 등이라고 모함한다.


요즘은 ‘종북’이 대세다.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시늉을 한다.

그것을 이 사실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침몰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세월호의 비극, 우리안의 미래

2014년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이 숱하게 일어났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사건과 국정원,검찰의 증거 조작 사실, 수서발 KTX 노선 민영화와 파업, 병원의 영리자회사 설립허용과 원격진료 등 많은 논쟁과 투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가던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전복되어 300여명이 넘는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와우아파트 붕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사건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직접적 원인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넓고 깊은 구조적 원인이 놓여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제도와 행태, 문화와 관행이었다.

청해진 해운이 18년 된 배를 일본에서 들여와 인천-제주 노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2009년 선령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하는 규제완화를 했기 때문이다.

승무원 절반을 비정규직 단기계약으로 고용했으며 그들은 적정량의 세배나 되는 화물을 선적했고 규정대로 컨테이너를 결박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를 ‘쳐부숴야 할 원수’이자 ‘암 덩어리’로 규정한 직후 세월호의 비극이 터졌다.


안전규제나 환경규제는 원수도 아니요 암 덩어리도 아니다.

규제 자체를 암으로 보는 것은 그 사람이 돈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참혹한 비극에는 제도의 결함과 함께 사람의 욕심과 무능, 실수가 작용한다.

출항이 늦어지자 승무원들은 과속으로 배를 몰았고 경험없는 항해사에게 배를 맡겼다.

사고 직후 승무원들이 곧바로 승객을 갑판으로 대피하게 했다면,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실 안에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대 마스터콘트롤키를 뽑아들고 혼자 대피해버린 기관사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세월호의 비극은, 어쩌면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유시민은 국민들이 이렇게 많이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말하였다.  


오늘의 50대가 10년 후 지금의 60대와 같아진다면, 지금의 40대가 10년 후 지금의 50대와 비슷해진다면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없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그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유시민은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그 55년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 모든 것에 공명하고 싶어하는 동시대의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과거 학술동아리에서 발표를 맡은 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시민 씨를 존경한다.

대학생 시절, 과에서 이런 말을 하자 어느 선배는 내게 미쳤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이후 다시는 그 선배와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

정치성향을 떠나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민주주의 위해 싸워왔고 아침 버스에서 꼭 챙겨 듣는 팟 캐스트와 ‘국가란 무엇인가’,‘청춘의 독서’ 그리고 이번에 읽은 ‘나의 한국현대사’까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거침없고 간결하며 정확하기에 더욱 존경해왔다.

그가 서울대, 독일유학을 거친 엘리트 출신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나의 눈에는 여전히 큰 존재로만 느껴진다.


이 책을 읽었던 당시 2015년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었다.

내 대학생활 중 가장 큰 대학가 이슈를 꼽자면 당연히 ‘반값등록금’ 시위였다.

어느 날 이웃 학교인 경X대에 다니는 친구 한 명이 반값 등록금 시위 관련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생각난다.

등교길에 자신의 학교 앞에서 또래로 보이는 학생들이 반값 등록금 시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업시작 전에 시간을 짬내어 시위하는 청년들을 향해 정문을 올라오던 한 커플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록금 얼마 안 하지 않아? 저거 못 내서 왜 저런데 ?’

친구는 ‘최소한 저러지는 말아야 하는데, 모두를 위한 투쟁에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정말 열이 받네’ 라고 분노를 자아냈다. 

역사적인 사건을 비추어 볼 때, 과거 대학생들은 항상 시민들보다 먼저 목소리를 높이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그러나 현재 대학생들은 과거의 그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반값등록금과 대학 구조조정문제, 그리고 졸업 후 실질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비 정규직과 같은 문제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무관심은 대학생들 스스로의 무의식적이거나 간사함이 녹아 들어가 생성된 것이 아니다.

경쟁만을 추구하는 사회와 괴물만큼 두려운 취업시장과 실업률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존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더욱 간절해하며 전략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에는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고려대학교 학생의 대자보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2010년대의 대학생을 ‘안녕 세대’라고 부르게 만들 만큼 더 큰 열풍으로 확산되나 싶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우리 본인들이 선택한 침묵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생존을 위해 인내하는 젊은 이들의 현실을 보는 것이 안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참여하고 관심을 갖자는 말을 하고 싶다.

시험기간에 시위에 참여하고 시험문제대신 신문을 읽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최소한 우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는 친구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 


유시민 씨는 이 책의 마지막에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미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 태도에 따라 달라지기에 미래의 이야기는 현재부터 어떻게 쓰여지냐에 따라 전개가 다르게 흘러나갈 것이다.

미래를 탄생시키는 것은 현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비로소 느꼈다.

소중한 삶의 이야기와 함께 반 세기의 역사를 전해준 유시민 씨에게 감사 드리며, 언젠가는 나도 나만의 한국현대사를 정리할 먼 훗날이 찾아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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