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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리 Oct 15. 2019

꽃피기도 전에 세상을 저버린 당신에게.

아픔의 공개


대인기피증, 우울증, 공황장애, 그 어디 즈음에 있는 사람입니다. 벽이 줄어들거나 천정이 내려앉는 놀라운 현상들 앞에 당황하고 무서워하며 인생의 일부를 헤매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술로 잠들고 전화벨 소리에도 놀라 책상 밑에 숨으며 나약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운전 중에 이 현상을 겪는 바람에 위험을 인지하고 병원을 다녔어요. 상담센터를 비롯 많은 곳에 돈을 날리다가 다행히도 더 심각해지기 전에 흙에 주저앉아 마음 깊이 상담할 수 있는 좋은 곳을 만나 조금씩 극복했고 자연을 사랑하며 치유했으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도움을 나누며 덕분에 제법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저도 이게 정확하게 무슨 병이고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는 모릅니다. 각 증상의 정의 또는 증상을 검색해보다가는 스스로를 더 가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어요. 스스로 선입견이 강한 사람임을 알기에 병원에서 상담을 하면서도 선생님께 제 병에 대해 정의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드렸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비슷한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이 발작이나 호흡곤란으로 실려가기까지 하는 많은 증상들 사이에서 더 진행되지 않았던 제 상태에 대해 감사하고 지낼 뿐입니다.






세상을 저버린 이에게.


네. 이런 저를 드러내는 이유는 오늘 비슷한 이유로 세상을 저버린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7-18년도에 이 병을 얻었고 언어적 폭력이었던 그 사유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요.


사람을 때리면 폭력이라는 범죄가 되죠. 사람을 죽여도 살인이라는 범죄가 되고요. 아니 사실 이렇게 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냥 길가는 누구한테 마시던 커피를 뿌렸다고 가정해볼게요. 그 얼마나 도덕적으로 틀린 일인가요.


커피를 뿌리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틀린 일임을 아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악플에 대한 위험성과 영향력을 혹시 아시는지요. 스스로 도덕성에 대한 마인드가 충분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악플에 대한 위험을 모르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혹은 본인의 언어가 폭력인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뿌리는 커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인가요? 혹은 흘리는 피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범죄인가요? 그래서 그 직접적인 과정과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폭력이 아니고 살인이 아닌가요?




악플을 남겼는데 왜 처벌을 안 하나요?

라는 말이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폭력을 가했는데 왜 처벌을 안 하나요?

라는 말과 동일 시 될 거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아주 빠르게 변화합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고 변화가 빠른 만큼 기회도 많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에 그러한 변화들에 대해 보호받을 수 있을 만큼의 정책이 없다는 대단히 무서운 단점에도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가장 공격받기 좋은 무대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치고 있습니다.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법이, 변화의 속도에 발맞추어 발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인드가, 이 모든 부재가 생명을 해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판단한 저는 새벽 4시, 충분히 퇴고하지 못해 내일 후회할지도 모를 글을 반드시 발행하고 자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그게 정말
모니터 뒤에 숨어
나에게 폭력을 가한 이유라고?


저는 유명인이 아니었음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만큼 잃을게 많았습니다. 제가 잃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들을 바라봐야 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 모든 마음의 병이 내 가족들까지 쉬이 말하며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생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걸 털어내기까지 더 시간이 흘러, 아주 나중에서야 그 언어적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너 들으며 그 사유가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글들이, 그 말들이 그저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수다 정도였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 인생 최고의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부족하게는 살아봤어도 못되게는 살아본 적 없는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고 손이 너무 떨려 스크롤을 내릴 수 없었던 스스로를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저’처럼 혹여나 비평의 소리 앞에서 내 잘못이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거나 시정하되 정상적이지 못한 사고를 가진 사람의 접근으로부터 생긴 그저 비난으로부터 온 피해에 대해서는 당당히 내 잘못이 아니라고,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이 다 있냐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멘탈이 그때에도 있었더라면 저는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이게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심지어는 제 부모님까지도 네가 무슨 잔다르크냐고 물으셨어요. 정말이지 등 어딘가에 날개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부모님 아래에서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하고 살아온 저를 이렇게 만든 건 세상이었습니다. 뚜렷한 주관으로 반짝거리는 인생을 사는 아티스트가 고작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떠들어댄 말과 익명성에 숨어 작성한 글들로 인하여 생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되고, 그걸 넘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세상.






그가 처해있는 '유명인'이라는 존재와,

대한민국에서 '어린 여성'이라는 바운더리는

얼마나 옥죄였을까. 이 사회는 얼마나 잔인했을까.


네, 저 오늘 감정 조절 실패입니다. 사람이 다쳤으니까요. 생명은 진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소중하니까요. 글을 쓸 때 서른 번쯤 수정을 하는 제 성향상 이 글이 내일 저를 후회하게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이 감정이 식기 전에, 이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이야기해야겠습니다.


포커싱이 아무래도 제가 공감하는 방향에 조금 더 치우쳤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제발요. 이 와중에 SM에게 아티스트 관리도 안 하고 뭐하냐는 글도 악플입니다. 악플의 밤이라는 프로에게 프로그램 이름이 그게 뭐냐는 글도 악플입니다. 물론 그 연예인이 그 프로그램이 시초부터 불편했고 선택하지 않았다면 말이 달랐을 수 있지만, 그녀 또한 소신 있게 목소리 낼 수 있는 그 프로그램을 선택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죽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과정을 방관한 사람을 만들어버리지 말아 주세요. 걱정을 빙자해서 목소리 낸답시고 또 누군가를 다치게 하잖아요. <악플>이라는 언어적 폭력의 범위와 그 무서움을 너무도 모르고 사시잖아요.


취미로 웹툰을 그리는 친구는 이런게 만화냐는 댓글에, 인플루언서로 사는 누군가는 독하게 생겼다는 댓글에, 사무직으로 CS를 담당하는 친구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상대의 무분별한 언행에, 상급자로 사는 친구는 무심코 보게 된 대화내용에 언급된 뒷담에, 심지어 누군가는 한 집에 사는 가족의 짧은 생각으로 부터 나온 언행에. 뇌를 오래도록 거치지 못한 그 말과 글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크게 다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진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고작 스물다섯, 제가 그 나이에 가지지 못했던 멘탈과 마인드를 가진 그녀를 존경했으면서도 그 악플을 이길 수 있는 정도의 응원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내지 못했음에 비통합니다. 낙태죄의 폐지를 공유하며 여성의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옳은 말이라는 목소리를 더 크게 함께 냈다면, 더 열심히 세상과 싸웠다면, 혹시 그녀를 지켜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지켜지기'를 바라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고. 그러니 그저 그가 닦아놓은 길을 잊지 않고 당당하고 소신 있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그 선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Rest in peace

이 말이 당신을 감히 위로할 수 있을까요.

그저 가는 길이 지독하게 춥지 않은 길이기를

이 진부한 글을 빌어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에게 힘듦이 와도 당신이 버틸 수 있는 만큼만 오기를. 당신에게는 특별히 상처를 빨리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를. 그래서 상처가 와도 상처 받은 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털고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당신에게 밤이 찾아오면 어둠의 두려움보다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어느 순간에도 당신이 절대 당신의 손을 놓고 미워하고 버리지 않기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힘든 나에게.
ㅡ글 배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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