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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Aug 01. 2022

리스본의 아침

리스본의 아침을 떠올리기

나는 종종 리스본을 떠올린다. 


혼자 떠난 리스본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실패였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방이 하얗게 빛나는 제2 터미널에 도착한 아침, 경유지인 파리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모든 파리행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나를 맞았다. 


해외여행을 적게 다닌 편은 아니지만 항공편이 취소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예상하지 않은 돌발상황에 당황했지만, 항공사 직원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별 것 아니라는 듯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기다릴지 아니면 다른 경유지를 통해 리스본으로 향할지 물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대안을 택했고 공항에서 4시간을 더 기다렸다가 계획에도 없던 도시로 출발했다.


처음 와보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너무 넓었다. 나는 모노레일에서 언제 내려야 하는지 몰라 쩔쩔맸다. 직원 한 명 없이 무인 체크인 기계만 나란히 놓인 문을 지나 천장이 낮은 탑승장으로 들어섰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탑승장은 공항이라기보다도 아주 큰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외투보다 더 가벼워 보이는 손가방만을 든, 편안하고 심드렁한 유럽인들이 가득했다. 이 나라, 이 대륙에 소속하지도 않은, 본래라면 여기에 없었어야 할 외딴 여행자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여행 가방을 걱정하고 있었다. 연결된 경유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방이 누락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들은 터라 더욱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 여행 가방도 낯선 외국 가방들 사이에 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겠지. 적당히 끼니를 때울 생각도 나지 않았고 행여나 졸릴까 봐 커피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면서 내내 전광판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리스본으로 가는 비행기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정 출발 시각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제 겨우 전광판에 리스본으로 떠날 비행기의 편명이 등장했다. 그러나 탑승 시작 시각과 게이트 칸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후 5시에 리스본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나는 밤 10시에 여전히 어두운 독일 공항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말이지 이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24시간 컨시어지를 운영하는 호텔이 아니었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인 마리아에게 도착하는 시간을 미리 알려주어야 했다. 나는 항공편이 -또!- 늦어져서 도착 예정 시각이 다시 바뀌었다고 메일을 썼다. 


마리아,
아무래도 자정이 넘어서 리스본에 도착할 것 같아요.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타고 갈게요. 
오늘은 정말 나의 날이 아닌가 보네요.


잠시 후 리스본에서 답장이 도착했다.


도착할 때까지 현관에 불을 켜 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말아요. 택시 기사에게 이 주소를 보여주면 돼요. 무사히 도착하길 바랄게요.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마리아


나는 그 짧은 답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에겐 내일이란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리스본도 서울도 너무 멀어서 그 가운데 어딘가에서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이미 여행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약 2시간이 지나 불이 거의 다 꺼진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다. 말없는 택시 기사는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구시가지에 홀로 불을 환하게 밝혀두고 있는 현관 앞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마리아는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은 먼저 푹 자고, 내일-아니, 아침에 봐요."

"오브리가다."


새벽이 되자 비가 내렸다. 리스본 구시가지의 자갈길에 쏟아지는 빗소리는 꼭 개울 한가운데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빗방울이 지붕 아래의 빗물받이를 통통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끼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장담한 대로 또 다른 날이 왔다.






마리아의 집은 게스트하우스라고 하지만 사실 소규모 호텔에 가까운 곳이었다. 3층 건물에 독실이 다섯 개였고,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 1층의 응접실에 아침 식사가 준비된다. 나는 마리아의 집에 머무는 동안 매일 이른 시간에 일어나 가장 먼저 거실로 내려왔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에는 커다란 자색 목련 가지가 꽂혀 있었고, 여덟 명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널찍한 테이블에는 알록달록한 식탁보가 깔려있었다. 노란 바탕에 분홍색과 붉은색의 이국적인 겹꽃들 사이로 끝이 동그랗게 말린 잎사귀와 앵무새, 베리 열매들이 꽉 차있는 대담하고 활기 넘치는 패브릭이었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어쩐지 매일 아침 식탁보의 무늬가 조금씩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사 준비를 돕는 소녀가 뜨거운 커피를 내려주면, 나는 그라사 구시가지를 향해 탁 트인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푸른 새벽하늘이 끄트머리부터 살살 연한 분홍색으로 변할 즈음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마리아와 커다란 대걸레가 보였다. 이 대걸레의 이름은 말라나인데, 아주 얌전해서 사람을 보고 짖는 법이 없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말라나는 코끝을 문지르며 인사하고 자신의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아침 식사는 작은 볼에 담긴 조각 과일로 시작했다. 주황색 멜론,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같은 색을 가진 과일은 하나도 없었다. 숟가락으로 반짝이는 색채를 퍼먹고 있으면  곧 식탁 여기저기에 오렌지 주스와 빵 바구니, 버터, 직접 만든 세 가지 잼이 놓인 접시가 차례차례 놓인다. 메인 요리는 매일 달라졌다. 햄과 치즈 샌드위치, 훈제 연어가 올라간 잉글리시 머핀, 오믈렛... 마무리는 매일 갓 구운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 이 모든 것들을 정석대로 먹는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리스본에서 맞은 첫 번째 아침, 전날의 시간적 손실을 어떻게 메울까만 생각하던 나는 여행의 시작을 일부러 방해하는 것 같은 이 느긋한 아침 식사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창 밖은 흐렸고 마리아가 구운 빵과 과일잼이 맛있었기 때문에 나는 성의껏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날, 그다음 날 천천히 아침을 먹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늦게 출발할수록 그날 하루가 더 여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마리아가 빌려준 지도를 들여다보거나 시애틀에서 온 부부와 몇 마디 나누었다. 우유와 주스와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모든 잼을 맛보고,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나 빨리 나가서 어딜 갔어야 했다는 자괴감도, 하나라도 더 눈에 넣고 사진에 남겨야 한다는 조바심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식사 끝에는 오늘 하루는 이 정도면 됐다는 만족감마저 들었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달달한 파운드케이크에 마지막 한 잔의 커피를 곁들여 먹을 때 즈음이면 2월 아침 리스본을 끝없이 뒤덮고 있던 잿빛 커튼이 젖혀지고 햇빛이 났다는 점이다. 거의 매일 밤 비가 내렸고 새벽하늘은 늘 흐렸다. 일찍 일어나 서둘러 나오면 으슬으슬한 바람에 옷을 여미거나 보슬비를 맞으며 돌아다녀야 했는데, 식사를 다하고 10시쯤 느긋하게 숙소를 나서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쾌적한 기온 속에서 여행할 수 있었다. 


정말 도무지 갤 것 같지가 않은데. 

나는 창밖에서 방울 같은 소리가 울리는 밤마다 생각했다. 혹은 초조한 새벽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회색 평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매일 아침 하늘은 거의 반드시 갰다. 마법처럼, 혹은 그냥 원래 예전부터 그러기로 했던 것처럼. 그저 그때까지 조금 길고 느긋한 아침식사를 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종 리스본을 떠올린다. 

비는 반드시 그치고, 하늘은 언젠가 개고, 내일은 꼭 오는 그곳의 아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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