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자의 일상
"물고기를 키워보면 어떨까?"
발단은 아빠가 지극히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였다. 아빠와 나는 청계천에 있는 수족관에 가서 어항을 샀다. 먼저 여과기며 히터, 돌, 수초 몇 개를 사서 세팅을 한 다음, 1주일 뒤에 다시 와서 물고기를 '봉달'(수족관에서 생물을 구매해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아오는 것)해 오기로 했다.
어떤 물고기를 데려올까, 느긋하게 기대에 부푼 아빠와는 달리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지독한 예기불안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어떤 일에 앞서 온갖 끔찍한 상상을 했다. 기말고사 전날 밤에는 늦잠을 자서 1시간 지각하는 꿈을 꾸고, 발표나 면접 때마다 얼어붙어서 할 말을 모두 까먹는 상상이 나를 압도했다.
물론 이번엔 하얗게 배를 뒤집고 둥둥 떠있는 물고기 시체들을 건져내는 악몽을 꿨다.
그런 건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멈춰지는 유형의 것이 아니었다. 내 머리는 언제나 멋대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고 이 불안을 피하기 위해 검색창을 열어본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구피와 테트라는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튼튼한 관상어라고 하지만 검색만 해보면 죽은 물고기 사진들을 올려놓은 블로그가 수도 없이 떴다. 어항 밖으로 튀어나와 죽고, 온몸이 뒤틀리고, 꼬리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죽어있었다. 사진보다 텍스트가 더 끔찍했다. 일주일 만에 다 죽었네요, 전멸입니다, 변기에 넣고 버렸어요, 그렇게 죽여가면서 배워가는 거죠.
너무 작은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내가 아직 키우지도 않은 미래의 물고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내가 느낄 리가 없는 무심함에 대해 경멸을 느꼈다. 작다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받아 마땅할 만큼의 크기라는 건 얼마일까. 다들 자신이 충분히 크다고 생각하는 걸까?
물고기를 데려오기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봉달을 해온 물고기들은 (인터넷에서 찾아본 대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쇼크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 1시간 정도 수온과 수질을 맞춰준 후에 어항에 넣었다.
일주일 동안 전전긍긍한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어항 앞에서 물고기들을 들여다보며 모든 행동을 분석하려고 시도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자는 걸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것뿐인가? 아니면 힘이 없는 걸까? 죽어가는 건 아닐까?
왜 갑자기 마구 움직이는 거지? 불편한 걸까? 스트레스의 표현인가? 서로 공격해서 뜯어먹으려는 건가?
거의 쉬지 않고 관상어 커뮤니티와 해외 사이트를 뒤졌지만 정보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물고기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자고 있어서 아니면 죽기 직전이었다. 계속 수면 쪽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산소 부족으로 인한 현상일 수도, 원래 그냥 수면 가까이에 머무는 어종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잘 살고 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 죽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고기들이 죽어있는 악몽을 꾸었다. 머릿수를 세어보고 새우가 한 마리 보이지 않으면 수초나 바위 틈새에서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이끼를 청소하다가 모르는 새에 찔러 죽인 것은 아닌지 공포에 질렸다.
강아지나 고양이 정도만 되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이 새끼손가락만 한 물고기와 새우들과는 쌍방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불안을 더 부채질했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주 조금 어항 환경을 바꿨을 뿐이지만 이들에겐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재앙이 시작되려는 암시를 찾아내려 애썼다.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끝내기 전까지는.
그리고 3주가 지났다.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았다.
불안에 사로잡혔던 나는 그것을 매일 조금씩 놓는 법을 배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물고기가 죽는 꿈을 꾸지 않고, 아침에 눈을 떠서 어항을 들여다보는 게 두렵지 않다. 물론 가끔 물이 흐려지거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덜컥 마음이 내려앉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을 해야 할 때와 하지 않아도 될 때를 조금씩 구분하게 되었다. 이 녀석들은 약하지만 아주 약하지는 않다.
나는 이 30cm 정방형 수조 안의 모든 것을 계획했다. 내가 흙을 깔고 돌을 넣고 수초를 심었다. 산소를 공급해주고 빛을 켜고 끄는 것도 나다. 나는 매일 수초의 모양을 다듬고, 신선한 물을 공급하고, 먹이를 준다. 이 어항의 탄생과 유지에 대한 오롯한 책임과 권한이 있는 것은 나다. 그러나 이 어항에 사는 물고기가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통제할 수 없고 그들은 알아서 살아간다.
내 불안이 가라앉은 것은 그 깨달음 이후였다. 이 어항이 나의 것이라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
어항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세상도 비슷하지 않을까. 신이 조명 스위치를 끄고 켜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어딘가에 정말 스위치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태풍은 우리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손가락이 물을 휘저어서 생긴 일일지도 모른다. 실수로 너무 많이 줘버린 먹이가 오염 물질이 되어 수질을 악화시키고, 떨어뜨린 뚜껑 고정대가 운석으로 떨어져 내렸을 수도.
... 그러니까, 어쩌면 지구를 매일 이렇게 들여다보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도 인간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이들이 도무지 생각만큼 잘 살아주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으려나.
나는 매일 이렇게 많이 노력하는데 이 작은 생명체들이 이걸 알아주기는 할까? 언제나 너희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바라고 있건만 대체 뭐가 불편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 이게 불편함의 표현인지조차 애매할 때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이 세계의 신에 대해서 역지사지라고 해야 할지,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묘한 동료 의식을 느끼며 조금은 즐거워졌다.
나는 어항 뚜껑을 열었다. 나의 생각도, 행동의 의미도, 내 사랑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조그만 물고기들이 멍하니 나를 올려다본다. 어항을 가진다는 건 신이 되기를 선택하는-혹은 강요받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ㅡ내가 작은 어항의 신이라면, 적어도 다정한 신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