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 프랑스에서는 11만 명이 넘게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극우와 극좌가 동시에 주도한 이 시위는 코로나 19에 대한 백신 접종 의무화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의무’라는 단어에 극도로 민감한 프랑스식 시민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집회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20년 6월 독일 슈투트가르트시에서도 코로나 봉쇄에 반대하는 폭력 시위가 있었고, 코로나에 지친 영국인들이 해변으로 몰려든다는 뉴스가 종종 보도되기도 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미국 아칸소주에서는 백신 강요에 반대하는 시위가 한창이다. 그들은 "우리는 모두 각자 신념이 있다. 고용주가 근로자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라며, 마치 자유의 투사인양 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집합 예배를 이어가고 있고, 해변 도시의 호텔에서는 단속에도 불구하고 풀 파티에 젊은이들이 모였다. 민주 노총은 거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강행하고, 각종 보수 단체들은 편법을 동원해 시위 행동을 이어가는 등, 다양한 저항과 위반(?)들이 코로나 시대의 한 국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과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코로나 이전의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가겠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그 하나는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이고, 또 하나는 ‘코로나 이전에는 정말로 행복했는가?’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지젝은 시위와 저항의 이면에는 일종의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코로나의 태생과 전파 메커니즘,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 “그건 모르겠고”, “그냥 예전처럼 살래!”라는 식의 의지 말이다.
물론 지젝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지’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소위 ‘선택을 위한 고의적인 무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 파괴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 알지 못하는 것을 통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될 수도 있고, ’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다.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무지해야만 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으라는 행정 명령에 대한 저항과 불법적 일탈 행위는 당면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아무런 긍정적 잠재성을 탄생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지젝의 결론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팬데믹의 온전한 진실을 무시하는 까닭은 인식론적 한계나 알고자 하지 않는 동물 주의적 의지 때문이 아니라 깊은 실존적 불안 때문이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 완전한 자유가 존재했다는 것은 허구이다. 우리 사회의 정말로 중요한 문제,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 환경 문제들은 코로나 전에도 여전히 존재했으며, 근본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조적으로 억압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계속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적 관계가 실제로 한때 존재했었다고 스스로 믿게 된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임상적 자료로 보건대 사회적 관계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실제로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지젝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유령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젝과 함께 살아있는 마르크스의 유령은 코로나로 인해 명백하게 드러난 자유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 부분 공산주의의 체제적 기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은근히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를 통해 분명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았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체의 생명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희생되어야만 하는 현장이 실재했고, 이 현장을 목격한 이상,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지젝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 코로나 4차 유행이 종전의 감염 기록을 훨씬 넘어서고 있고, 가장 강력한 거리 두기 지침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거리 두기 참여는 갈수록 저조해지고 있다. 이동과 행동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사유와 욕망,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언젠가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인간의 본능을 규명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러한 코로나 국면을 달리던 본능이 도착한 목적지에 ’ 위드 코로나’라는 팻말이 달려있다. 결국, 인류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일부 국가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서고 있다. 지젝의 말대로 마침내 우리에게는 돌아갈 과거는 없어졌다.
지젝은 팬데믹으로 인해 공동체적 삶에서 격리된 삶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친밀성과 거리 두기가 하나의 양상에서 다른 양상으로 복잡하게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하며, 다음 같은 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얼굴을 요구한다.
“우리는 민얼굴이 아닌 마스크를 한 얼굴에 더 많은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엄중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지젝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닐까?
과거, 지젝은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이란 책을 통해 이슬람권 여성들이 얼굴을 베일로 가리는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 있다.
"여자는 나부끼는 베일들 뒤에도 궁극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자를 베일로 가리면서 환상을 만들어 낸다. 베일 뒤에 여성다움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다움의 진실이란 거짓과 속임수 같은 끔찍한 진리를 가리킨다) 이슬람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숨은 걸림돌이 바로 이것이다. “
지젝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의 베일은 남성이 만들어 낸 환상이지만, 팬데믹 속 마스크는 실재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라는 집단 이념을 떠나서 실재냐? 환상이냐?라는 것이고, 백신이나 방역이 이에 대한 저항이나 집단 반발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뜻이다.
언론의 자유
말 위의 놓아둔 등불처럼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민주주의의 구석구석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가짜 뉴스에 대한 손실 보상법 역시 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지금까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는 ’ 언론의 자유’를 불가침적 성역으로 치켜세워 왔다. 삼권분립으로도 지켜내지 못하는 체제의 영역에서 희생적인 언론의 역할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전설이 된 것은 ’ 언론의 자유‘가 아닌 ’ 언론의 권력‘이 아닐까?
페미니즘이 주창하듯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팬데믹 상황에서 일부의 자유가 제한되듯이 언론에 대해서도 무제한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러셀의 말을 인용한다.
“대중이 실질적으로 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민주적 시스템에 반영하지 못하는 무능력,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십 년이 훨씬 넘게 지속된 것이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그 위기를 어느 한도 이상으로 폭발시켰을 뿐이다. 해결책은 분명 모든 소수 의견을 좀 더 포괄하는 모종의 더 진정한 민주주의에 있지 않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프레임 자체가 폐기돼야 한다.”
생각해보면 가짜 뉴스는 바이러스와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상성과 관계의 회복(?)
돌이켜 보면, 처음으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가 발생했을 때, 보수 진영에서 내세웠던 반응은 ‘봉쇄’였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모든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반면, ‘대구 봉쇄’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 역시도 보수 진영이었다.
미국 사회는 더 심각했다. 바이러스의 근원지로서 중국이 지목되었고, 중국인과 색깔과 모양이 비슷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지젝은 이러한 현상의 뒷배경에는 다원주의를 배격하는 뉴라이트의 속성이 숨어 있다고 일갈한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마스크를 쓰라고 요구받은 비행기나 버스의 승객이 난폭하게 반응하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볼 때, 코로나 이전의 인간들의 ‘관계’가 무엇이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들이 주장하는 관계 회복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최근 한 요양 병원에서 방호복을 입은 채 한 노인과 화투를 치는 간호사의 모습이 매체를 통해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의 공격을 뚫고 영웅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관계를 개척하고 있는 의료진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고 있다.
반면,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문제들, 일건대 보편적 의료, 사회적 양극화, 국제 분쟁과 환경의 문제까지 변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 새로운 국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국면을 이해하기 위해 지젝은 오늘날 편재된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를 비판과 함께 ’ 일상성‘이란 단어를 꺼낸다.
따지고 보면 ’ 일상성‘이란 단어에는 코로나 국면의 모든 현상이 함축되어 있다. 지젝은 이 ’ 일상성’이라는 단어가 라캉이 말한 ’ 대타자‘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상징 질서, 즉, 우리의 심리적 삶뿐만 아니라 우리가 ’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과 관계 맺는 방식까지 구조 짓는 법칙과 실행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 여기서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저 ’ 바깥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상징적 우주에 의해 매개된다는 초월적 사유의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복잡한 말을 풀어헤치자면, 코로나를 포함하여 현실과 경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상호 작용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각종 ’ 일상의 의례‘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규모가 축소되고, 규모에 따라 형식이 바뀌며, 형식의 변화에 따라 내용이 재정립되듯, 우리 생활의 법칙과 실행의 네트워크에도 변화를 주도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의례들이 굳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활의 변종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코로나 시대에 변종이 바이러스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 세계에서도 변종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활의 변종이다.
지젝은 두 가지 변종 사례를 제시했는데, 바로 재택근무와 배달 노동이다. 이 두 가지 변종은 모두 착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코로나가 해결된다고 재택근무나 배달 노동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이니, 중요한 것은 착취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지젝도 지적했듯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와 함께 의존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과도한 소통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 다 좋다는 뜻이 아니라, 좋은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코로나로 인해 진정 홀로 사는 것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그동안 정리하지 못한 번잡한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