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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Oct 13. 2022

나 홀로 볼링(1)

소통하는 사람들

나 홀로 볼링

30년 전, 직장인의 필독서라고 불리던 책이 있었다. ‘미국은 왜 일본에 추월당했나?’라는 도전적 제목의 경제 서적이 바로 그 책이었다. 최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책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 책의 제목을 찾아볼 수 없었다. 30년 전의 필독서는 그렇게 인터넷에서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 책이 출판되었던 199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초호황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측은 과장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에 의해 주도된 엔화 고환율 정책과 수입개방 압력으로 일본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곧 잃어버린 10년이 이어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30년 전의 필독서, 그래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있다. 잘못된 예측으로 인한 혼란은 역설적으로 미래의 정제된 정책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20년 전, 그리고 30년 전의 세상을 돌아보며, 망각된 논지들은 예측의 오류를 규명하고 변화의 추이를 가늠하는 새로운 잣대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관점을 확대해 본다면, 우리와 전혀 다른 사회적 배경, 예측의 오류 등으로부터도 우리는 상대적 교훈을 얻어낼 수 있다. 이 책, ‘나 홀로 볼링’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와 현대적 민권 운동이 시작됐었던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전후를 중심으로 미국 사회가 어떻게 개인주의화되고, 또 어떤 경로를 거쳐 탈 공동체화가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미국의 진보-보수를 아우르는 대통령의 정책 자문을 역임하기도 했던 정치학자인 로버트 퍼트넘은 풍부한 데이터를 토대로 미국 사회, 특히 세대 간의 문제를 진단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20년이란 시간은 이 저명한 정치학자의 분석 속에서도 예외 없이 예측의 오류와 분석의 문제점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2020년대 한국이라는 사회를 기준으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차이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유용하고 유익한 역사의 교훈을 찾는 데 있어서 ‘차이점’은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저자(1990년대 미국)와 독자(2020년대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에서 공동체 붕괴의 지표로 삼은 주제, 즉 ‘사회적 자본’의 근간이 되는 ‘접촉’의 방식에 있어서 20세기와 21세기의 양태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 사이 접촉 양태에 있어서 절대적 환경인 IT 기술은 주로 2000년대 이후 적용되었다. 유튜버는 2005년에, Facebook은 2004년, 그리고 Instagram은 2010년에 대중화되었다. 2000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접촉의 양태가 나타난 것이다.     

둘째, 미국은 18세기 초대 대통령 선거를 시작한 이후에도 여성의 참정권이나 짐 크로우 법, 유권자 등록 제도 등으로 인해 선거(주로 대선)가 온전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도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논란과 성찰을 통해 발전해 왔다.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과 제도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시간을 소비하면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제헌의회를 통해 사회적 갈등 요소가 제거된 온전한 형태의 순수한 민주적 선거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입되었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성숙되지도 못한 민주주의는 1960년대 이승만 정권, 1970년대 박정희 정권, 그리고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라는 무려 30년이 넘는 일탈과 이에 대한 혁명적 반항 운동을 경험해야만 했다.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미국 사회를 바라본 로버트 D. 퍼트넘의 통찰을 빌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다시 말해 퍼트넘의 지적 플랫폼 위에 한국의 개별적 데이터나 상황을 비춰 보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와 갈등, 정치적 현안과 문제점을 보다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해 가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데는 몇 가지 내용 외적인 소감이 교차된다. 첫째, 미국과 한국의 세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을 관통하는 세계적인 흐름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 각종 매체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들과 비평가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심층적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인문 서적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하는 아쉬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쉬움이 바로 미국이라는 다른 사회를 분석한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근본적으로 세대를 분석한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세대 가름의 기준이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부터 1977년까지 출생자를, X세대는 1965년에서 1976년 사이 출생자, 1980에서 1997년 사이 출생자는 M 세대, 그리고 대략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에 태어난 세대를 Z 세대라고 부른다. 이 각각의 세대는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성향과 특성들을 내재하고 있다.     


때와 운명이 전적으로 사주팔자에 좌우된다고 믿지 않는다면, 또 인간을 구성하는 인과 관계가 염색체나 뇌, 또는 장내 세균이 전부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면, X부터 MZ까지 구분되는 세대 간의 뚜렷한 차이점은 그들이 탄생하고 성장하면서 인지하게 된 사회적 배경과 사건에 대한 인식과 영향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가족이 그렇듯, 아버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아들 세대인 M 세대와 30년 이상의 시간을 같은 가정과 사회와 정치적 환경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보낸 시간은 결코 같은 시간과 역사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사회적 시간과 개인의 시간은 다른 시간의 강물을 따라 흘렀을 수 있다. 이런 시간의 괴리, 세대의 괴리라는 강물을 언제 어디에서 근원 하며, 또 흐르기 시작한 것일까? 퍼트넘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에는 같이 치는 볼링이 왜 오늘날에는 혼자 노는 볼링으로 변화한 것일까?     


로버트 D, 퍼트넘


사회적 자본 – 선한 자본과 악한 자본

이 책에서 공동체 참여도, 또는 그 반대 개념으로서의 개인주의화의 척도로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자본’이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정의한 사람으로 리다 하니판을 지목한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형의 실체, 예를 들면 사회 단위를 구성하는 개인과 가족들 사이의 호의, 동료애, 동정심, 사회적 교섭 같은 것을 말한다. (...) 개인들은 홀로 고립되면 속수무책이다. (...) 한 사람이 자신의 이웃과 접촉하는 식으로 계속 확대하면 사회적 자본이 축적될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하니판의 정의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이란 선한 접촉의 확대를 통해 얻어지는 재산이다. 이러한 정의에 더하여 사회적 자본에는 사적 측면과 공적 측면에서 모두 유익한 것이라는 의견을 단다. 예를 들어 로터리나 라이온스 클럽 같은 봉사 단체들은 장학금을 모으고 질병과 싸우는 데 지역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동시에 회원들에게는 사교와 사업상의 접촉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적 측면과 공적 측면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니판의 이런 정의에는 한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접촉 그 자체가 선해야 된다는 것이다. 호의가 아닌 악의, 동료애가 아닌 극한 경쟁심, 동정심이 아닌 냉혹함, 이권에 집중된 사회적 교섭의 확대 역시도 사회적 자본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마이너스 자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정치 참여도 – 세대의 문제인가환경의 문제인가?

저자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가 바로 정치 참여도다. 투표율, 공공업무에 대한 관심도, 정당 관련 활동, 지역 공동체 수준의 정치, 협력과 표출 양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저자는 가장 먼저 투표율이 1960년대 이후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개별 선거마다 증가와 감소는 있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 투표율의 실질적 감소 원인은 뉴딜과 제2차 대전 기간 출생한 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로 구성된 유권자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이후에 출생한 세대들이 유권자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시장이 바뀌면 취향이 바뀌듯, 성도덕 관념이 시대에 따라 변해 가듯, 그렇게 사회적 생리의 변화가 미국민의 투표율을 감소시켰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를 ‘세대 간(Intercohort)’의 차이라는 사회학적 용어로 설명하는데, 예를 들자면 편지 세대와 전화 세대 간의 차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투표율의 감소는 개인 성향의 변화가 아니라 세대의 변화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투표 참여율의 저하가 바로 미국 사회에서의 공동체 생활에 대한 광범위한 이탈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1975년에서 1999년 사이, 미국의 투표율이 1/4로 줄어드는 동안, 공공 업무에 대한 관심 역시도 1/5로 줄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이 모든 것이 세대 간의 격차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대선 투표율은 89.2%로 투표율 면에서 아직 이 기록을 깬 대선은 없었다. 이후, 투표율은 2007년 63%까지 지속해서 내려갔지만 2017년 다시 77.2%로 상승했다. 이러한 추이를 두고 세대 간의 격차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던 1987년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거물급 정치인이 모두 대선에 참가한 해였다. 여기서 후보들은 각각 36.64%, 28.03%, 27.04%라는 박빙의 득표를 하였다. 돌이켜보면 당시 각 후보의 정치 행사에는 엄청난 지지자들이 동원되었고 여의도 광장이 동원된 사람들로 미어졌다.     


반면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였던 2007년은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투표 전부터 이미 압도하고 있었다. 결과는 이명박 48.67%, 정동영 26.14%, 시시한 승부였다. 이미 승부가 예측되는 긴장감 없는 대선은 당연히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이는 낮은 투표율로 나타났다.      


투표율이 재상승했던 2017년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박근혜 권의 국정 농단에 의한 하야와 이어진 대선이었다.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된 시민들은 대선을 두고 사활을 건 싸움을 했고 이 역시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다.      


이런 데이터를 놓고 볼 때,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투표 참여율은 세대 간의 차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세대와 관계없이 대선의 투표율은 이벤트와 정치적 상황에 더 좌우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세대 갈등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 

오늘날 한국의 가슴 뛰는 젊은 시민들은 젠더 갈등보다 더 심각한 것이 세대 갈등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지어 세대 간 이해를 촉진하는 공익 광고가 등장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세대 갈등이 크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수학이나 논리학의 측면에서 증명 없이도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를 ‘공리’라고 부른다. 동시에 ‘공리’라는 단어는 일반 사람과 사회에서 두루 통하는 진리나 도리를 뜻하는 사회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이삼십 대와 오륙십 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공정에 대한 논쟁, 젠더 갈등, 대북 문제를 포함한 정치적 현안에 대한 논쟁 속에는 분명 세대 간에 서로 다른 공리가 존재한다. 이런 세대 갈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로버트 D. 퍼트넘은 이 책에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주제로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 현상을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세대 격차에서 기인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 하에 그는 공동체의 소생 가능성을 개인의 변화에서 찾았다.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동료 시민들이 친구와 이웃들과 다시 연계 관계를 맺으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아무리 제도 개혁이 되어도 효과가 없다는 사실, 아니 아예 제도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투표율 지표에 대한 논쟁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결론과 소생 프로그램을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원인도 다르고 결과도 틀리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최소한 한국에서의 세대 갈등은 단순한 시간적 격차에 의해서 발생된 것은 아니며, 공동체화는 붕괴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양태가 바뀌어 가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칠팔십 년대의 볼링장은 귀족적 냄새가 났었다. 반바지를 입으면 출입이 되지 않았고, 볼링 장비를 갖추는 데에도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있었다. 옆 레인에서 플레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강요되었고, 음주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최근의 가 본 볼링장은 많이 변해 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음주가 가능하며, 옆 레인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크게 중요시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여전히 볼링을 즐기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있겠으나 그 정도는 예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혼자 치기는커녕, 더욱 활기찬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단지 미국과 한국의 차이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Derek Thompson이란 미국의 작가는 나 홀로 치는 볼링장 현상이 세대 간 격차라는 저자의 의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미국의 볼링장은 단순히 인구가 감소한 것이 아닙니다. 수천 개의 교회, 레스토랑, 바, 카페, 체육관, 극장, 그리고 물리적 공동체를 보존하거나 육성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물리적 공간과 함께 그들은 소멸하여(gone dark) 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에도 역시나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Derek Thompson의 사용한 ‘gone dark’라는 단어가 바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비평에서 작가가 나열한 공동체 공간들은 ‘소멸하여 갔다’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바뀌어 갔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세대 간의 갈등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각각의 세대가 살아온 ‘같은 시간의 다른 역사’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먼 과거의 역사만큼이나 10년 전, 20년 전, 그리고 30년 전의 역사에 관한 공부와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밝힌 ‘미래에 대한 예측 오류’와 ‘현재에 대한 분석 오류’를 건설적인 반면교사로 삼자고 제안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20년 전, 30년 전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IT 환경이란, 그리고 미래의 기술과 그 기술에 기초한 사회의 작동 원리는 오히려 세대 간의 간격을 더욱 좁혀 주기에 유리하다. 단지 우리는 공부하고, 그 공부의 열매로 이해를 수확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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