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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an 31. 2023

트라우마 청소하기

겨울 나무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살았는데, 어찌 상처가 없을까?  

  

프랑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TED 강연을 통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전복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이 완벽하게 공정하다면 지금 나의 실패와 커리어의 위기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지요. 다행히(?) 세상이 불공평하므로 우리는 오히려 실패의 명분을 찾을 수 있고,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름대로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변명은 치유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변명을 통해 위기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찾을 수 있고, 또다시 일어설 의지를 재장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성공의 크기와 자신의 능력이 완벽히 일치되는 공식이 반가운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변명과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실패한 마이너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팍팍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알랭 드 보통은 과거의 실패와 현재의 초라함, 그 원인을 자신의 무능력이나 인격적 모자람에서 찾아내어 굳이 자기 비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꾸며,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가정과 나는 운이 없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안을 주면서 불안의 크기를 낮추려 했던 것 같습니다.      


불공정의 객관적 증거를 찾는 일, 그것은 비단 알랭 드 보통의 시도만은 아닐 겁니다. IBM의 전 회장이었던 칼리 피오리나도 회고록에서 자신의 경험상, 직장에는 능력자와 무능력자가 모든 직급에서 공존하며, 이는 결국 능력자가 직장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했으니까요.      


아무튼, 오늘도 직장인들이 모인 술집에는 그런 불공정의 사례들을 낱낱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합리적인 것도 있고, 또 일방적이고 왜곡된 주장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죠. 그곳은 일종의 심리상담소이자, 치유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온 세월은 트라우마의 연속이었는지 모릅니다. 상사의 사소한 질책에 대해서 과한 각성으로 반응하거나, 진급이나 사업에 실패한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고 회피한 나머지 결국에는 성공 욕망마저도 억제하려고 하는, 그러다 그렇게 쌓인 상처에서 매일 밤 생생하고 선명한 유령이 나와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고요. 늙은 사자의 피부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합니다.     



은퇴한 후까지 그 상처를 가져갈 것인가?   

  

심리학자인 앨버트 엘리스는 우리가 일상에서 범할 수 있는 11가지 잘못된 신념을 나열하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는, 즉 좋은 사람은 성공해야 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초적 신념이 실은 우리를 괴롭히는 믿음이며, 우리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상처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일종의 병리이자 치료의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이 편재된 외부의 시각, 즉, 객관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켜 그 안에서 위안을 얻도록 유도하려는 시도라면, 앨버트 엘리스의 ‘잘못된 신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을 교정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잘못된 각성을 바로 잡아 스스로를 구원하게 하는 도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공통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사실 타자에 비친 내 모습 때문이고, 우리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패배가 아니라 패배자의 낙인이라는 것. 성공과 실패에 대한 스트레스는 결국 타인의 눈을 염두에 둔 대한 나의 기준으로부터 온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언제까지 실존의 불안을 안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 적절한 시기에 이를 해결할 필요가 있고, 은퇴는 이것을 해결을 위한 가장 좋은 계기이자 기회입니다.     



과거는 잊기로 해요.     


생각할수록 더 깊게 각인되는 초라한 과거, 회피하고 싶은 실패의 경험, 되새김질하게 하는 비겁했던 처신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타인의 눈과 자신의 잘못된 신념이라는 중력에 밀려 떠돌던 별을 떠나, 경험해 보지 않는 별을 찾고 기존과는 다른 중력 위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퇴 후,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동안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과거를 재해석하거나 복기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죠.     


직장에서 성공하고 사회에서 뜻을 이룬 사람도 별반 다를 것 없을 겁니다. 나이가 들고 조직을 떠나면 초라해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무기를 잃어버린 노병처럼, 지난날을 회상하며, 치열했던 과거를 화려하게 포장하지요. 더욱 처연해 보일 뿐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을 잊어야지요. 실패했던 과거처럼 성공의 기억도 잊기로 합시다.     


겨울이 오면 좋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알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화려했던 이파리들이 떨어지고, 웅장했던 가지들이 쪼그라들면, 보잘것없는 둥치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숲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겠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새로운 봄에 대한 기대, 화려한 여름에 대한 꿈, 회상의 가을을 건너 또 하나의 겨울이 오겠죠. 그 겨울엔 지난겨울에 버린 상처들로 인해 우리는 조금 더 좋아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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