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전히 제가 쓰는 시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고 스스로의 운동으로 어딘가에 가닿기를 바랍니다. “
시인 이제니는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처럼 말했다. 그의 소감처럼 ’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려 하지 않는 시(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일 수 있다. 시인 스스로가 시에서 멀어지고자 했는데, 시라는 기준점으로 다시 끌고 와, 틀에 묶어놓고 앞에서 뒤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곁눈질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인 스스로가 밝혔듯이 ‘스스로의 운동으로 어딘가에 닿기를 바란다.’라는 바람이 있었으니, 어찌 되었든 그 시가 마음에 와서 닿았을 테고, 그 닿은 곳 흔적에 감상이 남지 않았겠나.
존 케리는 ‘시의 역사’에서 미학적 판단에는 옳고 그름이 없고 의견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책에서 예전에 몰랐던 시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날의 생각 속에 품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제니 시인의 시를 발견한 것에 극적인 발견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날이 품고 살 일도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 갔고, 신간 코너를 돌다가 아무 책이나 집어 든 것이 이 시다. 오랜만에 느닷없이 시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돌이켜 보니, 시에 대해 묶여 살았던 지가 꽤 오래됐다. 아마도 강은교 시인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20년쯤 지났고, 지금 강은교 시인의 시에 대해 남는 것은 ‘비움’이라는 단어 하나뿐이다. 훗날 이제니 시인에 대해서는 어떤 단어가 남을까?
최소한 ’ 시(詩)‘다.
그래서 사실 존 케리의 ’ 시는 미학적 판단이기에 의견만이 존재한다 ‘란 시론이 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다. 시란 ’ 판단‘이 아니라 ’ 느낌‘이고, ’ 의견‘이 아니고 ’ 감상’이라는 것이 통상적 시론 아닌가? 그러나, 이제니 시인의 ’ 발견된 뒤에야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먼지의 춤’이란 시어는 통상적 시어에서 조금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시인이 의도했던 바일 것이다.
시의 형식은 시에서 멀어졌으나 그 내용은 오히려 시에 더 가까워졌으니, 이제 이제니 시인의 시어는 실존주의적 향기를 듬뿍 담은 채, 100년 전으로 돌아간다. 일찍이 김춘수나 조병화 시인이 노래했던 꽃이다. 예를 들자면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또는 “나 하나 꽃피어” 같은 표현이다. ‘꽃’은 100년을 지나 ’ 춤추는 먼지‘가 되었다.
무려 ’ 시(詩)‘가 되었다.
깨달음과 깨침
시인은 왜 발견하는 춤이 아닌, 발견되는 이라고 했을까? 방안에는 늘 먼지가 존재하지만 특정한 파장의 빛이 비쳤을 때, 비로소 먼지는 춤을 춘다. 여기서 춤은 나의 노력으로 능동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빛에 의해 저절로 인지되는 존재다. 때문에, 이는 깨침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의 순간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순간 저는, 보지 않으면서 보았던, 보면서 보지 않았던, 매 순간 지나쳐 온 그 모든 언덕과 눈길과 주름과 잔상과 풍경과 사람들을 다시 제대로 찬찬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얼굴 없는 기도가 어디로 어떻게 가닿을 수 있는지를 물었던 저의 오래된 질문은 그것 그대로 하나의 대답으로 돌아와 저의 슬픔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
떠나가신 엄마의 부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었다. 모든 것은 가치를 상실했고, 보이는 것은 초점이 사라져 버렸다. 뚜렷한 대상이 증발한 세상. 남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뿐이다. 현재는 인지되지 않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그런 세상을 유배처럼 방황하다 시인은 마침내 엽서 속 사진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
大타자가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얼굴 없는 수도사의 기도를 통한 각성은 小타자를 탄생시키고, 그것이 꽃이 되고 춤추는 먼지가 된다. 어둠 속의 꽃병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꽃병이 되고, 들판에 만개한 꽃은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된다. 얼굴 없는 수도사의 기도는 그 기도를 인지한 순간 나를 위한 위로와 기도가 된다. 먼지는 빛이 그것을 비추었을 때, 춤추며, 엄마가 사라진 세상에도 사랑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어를 두고 어떤 시인은 ”경험의 시선에서 시적인 언어의 시선으로 이동’이라고 평했고, 또 다른 시인은 앞말이 뒷말을 밀고, 뒷말이 앞말을 받으면서 섞이고 스미고 흘러가는 언어의 운동성과 리듬”이라고 했다.
이런 평은 너무나 시적이다. 시인 스스로 시에서 멀어지고자 했으니, 시로부터 거리를 두고 읽어보니, 이는 깨달음과 깨침의 굴곡을 넘나드는 의식 흐름의 언어적 표현이다. 주술적 언어는 의식 밖의 언어이지만, 이제니 시인의 언어는 지극히 의식적이다. 경험과 의식은 일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니 이는 늘 넘나 든다.
저마다 다른 해석, 시인의 표현에는 객관성이 필요할까? 예를 들어 한 정치인이 서쪽 하늘에 지는 노을 같은 노년을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노을의 색깔에 객관성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25도 상온에서 80%의 습도, 1.05 밀도의 공기를 60 옹스트롬의 파장으로 통과하는 빛이라고 하면 가장 객관적일 수는 있지만, 최소한 시일 수는 없다.
시어가 객관성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경험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도 그런 경험의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어,
”단단한 얼음을 도려낸 듯한 작은 호수“
이 문장을 보면서 최소한 3개 이상의 그림이 떠올랐다. 얼음장 일부를 도려내어 작게 드러난 물, 단단하게 얼어버린 각진 얼음 덩어리, 유리알처럼 반질거리는 표면, 그러니 시인이 그리고자 했던 그림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를 서사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 그림은 조금 명확해진다. 엄마가 사라진 세상, 모든 것이 얼어 단단해진 마음,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져 짱짱해진 인생, 그러나 어느 날 깨져버려 도려낸 듯한 얼음장 밑으로 여전히 찰랑거리는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