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고유의 '정체성'만 있을 뿐.
나무는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는다.
어릴 적 나의 꿈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평범하게 졸업해서 평범하게 가족을 만들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내가 어릴 적 평범에 집착했던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평범하게 좀 행동하면 안 되겠니? 너 커서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는 말을 하셨었다.
나는 왜 평범하지 않을까? 난 정말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 될까?
사실 엄마의 말도 맞았다.
키가 커 다리가 다 삐져 나올 때까지 애착이불을 덮고 잘 정도로 한 가지에 빠지면 유난히 집착하고,
지나가는 낙엽 한장에도 울 정도로 유난히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했다.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보일 정도로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더라도 밝은 그림보단 어두운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유치원 시절의 기억이 있었다.
엄마가 열심히 모아둔 유치원에서 준 평가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창의적인 면이 있으나, 예민하고 교우 관계가 원만하지 않음'
내가 좀 예민한 편이기도 했고. 혼자 노는 걸 워낙 좋아하고 양보하는 것도 안 좋아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엄마는 많이 속상해하셨을 것이다.
이 시절, 난 창의적으로 놀이를 하는 데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부엌놀이를 하고 있으면 그걸 유심히 보던 다른 애가 와서 자기도 하고 싶다고 했다. 난 싫다고 하다가 싸우고. 선생님은 오셔서 다른 아이들과 돌아가면서 놀아야 한다며 나에게 양보하라고 하셨다. 다른 곳으로 가서 이번엔 가장 인기가 없는 장난감을 골라 혼자 새로운 방법으로 놀고 있으면 그게 재밌어 보였는지 또 다른 애들이 와서 그 걸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평소에 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애를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럼 난 다시 양보해줘야 했다. 난 집에서도 온전한 내 것이 없는데 여기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방향 없는 분노와 원망이 계속 쌓여 갔고, 그런 베베꼬인 성격이 날 더 예민하고 거친 아이로 만들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커서, 초등학교 때의 나는 참지 않았다. 나를 놀리고 비꼬는 반 친구들에게 꼭 똑같이 해줘야 했다.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도 한 몫했을 것이다. 몸집이 작았지만 지더라도 싸워야 했다. 그냥 참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나를 보호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자피 난 나와 맞는 친구들 하고만 친해도 충분히 재밌었으니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두루두루 어울리지 않고 한두 명의 친구하고만 놀고, 싸움닭 같은 나의 모습 속에서 엄마는 평범하라고 말했다.
물론, 지금 내가 생각해도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정말 키우기 힘든, 특이한 점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엄마가 말한 '평범'이라는 잣대가 주어진 후 나는 평범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냥 '평범'이라는 족쇄는 다른 사람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잣대만 주어졌을 뿐이었다. '평범'이라는 이름의 '비교'였다. 그리고 그 비교는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령처럼 있는 것이 평범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틔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에게 뒤떨어질까 무서웠다. 왜 난 이 모양일까, 자존감이 낮아 질대로 낮아진 나는 스스로에게도 답답한 청소년기를 보냈었다. 물론 엄마로 인해서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사춘기가 오기도 했고, 왕따를 당하며 나는 더 작아지게 되었다.
나에게 평범을 말했던 엄마도 엄마의 상처였다. 엄마 역시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회생활에 유난히 적응이 어려웠던 엄마의 아픔을 그대로 빼다 닮은 내가 안쓰러워서, 다를 다그치는 것만이 옳은 길로 가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우리 모녀는 이 시기의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혼자만 꽃을 핀 벚나무를 보았다.
겨울엔 다 같은 나무 종류인줄 알았는데, 잎이 나고 보니 혼자만 다른 종류의 나무였다. 이 나무는 어쩌다 혼자만 이곳에서 자라 버렸을까. 어쩌면 이 세상에 벚나무라고는 자기 하나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세상엔 수많은 벚나무가 있다는 걸.
당장 눈 앞에서만 보면 다른 나무와 모양이 다른 자신만 보이지만 조금만 멀리 보면 나와 같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옆에 있는 나무를 따라 나만 이상해 보인다고 푸른 잎만 돋았으면 이 벚나무는 봄에 예쁜 꽃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는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왜 거기 혼자 다른 나무가 자랐는지는 모르지만, 그 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 사이에서 자신의 꽃을 활짝 피어냈다. 분명 꿋꿋하게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켜 내었을 것이다. 네가 어떻든, 내가 어떻든.
'나'라는 나무는 채 다 크기도 전에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다른 나무인 줄 알고 나의 잎을 숨겼다. 세상엔 나와 같은 종류의 나무가 많은데, 당장 주변에 있는 나무의 종류만 보고 부끄러워해 버렸던 과거의 나. 그렇게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라는 사람을 인정하는 것. 그건 다른 누군가가 해줄수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지키는 건 나였다.
그러니까 평범이란 없다. 모두 고유의 '정체성'만 있을 뿐.
지금 나는 평범하냐고 물어본다면,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성격도, 환경도, 삶도 일반적이진 않다. 그런 내가 좋다. 특별한 나를 사랑한다. 그게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