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계속 비가 오고 날이 흐려서 새벽에 일어나면 어둑어둑하다. 우드 블라인드를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아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것을 보고 '비가 오는구나' 알 뿐이다.
남편은 출근하기 전에 나에게 꼭 날씨를 물어본다. 그럼 나는 날씨를 검색해서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온다면 몇 시부터 오는지, 최고 온도와 최저 온도는 몇 도인지를 상세히 알려주곤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 꿈이 기상캐스터였는데, 그 꿈을 주부가 되어 집에서 이루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남편은 장화를 신고 출근한다. 정확히 말하면 장화라기보다는 '방수기능이 추가된 첼시부츠'지만, 어쨌든 비 오는 날 신으니 나에게는 그냥 '장화'다. 남편의 추천으로 나도 이번 여름부터 장화를 사서 비 올 때 신고 다니는데, 아주 신세계다. 비가 와도 발이 젖지 않아서 너무 쾌적하다. 물론 그래도 비 오는 날에는 잘 안 나가지만.
오늘도 평소처럼 남편이 출근한 후 책을 읽고 있었다. 밝아지려고 하는 하늘을 곁눈질로 종종 확인하면서. 그때,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날씨 대박
파리급으로 비 온다 밖에
역까지 걸어가다 무릎 아래로 다 젖음ㅋㅋㅋ'
'헐 진짜??? 대박
안보였어'
밖이 잘 보이지 않았고 이중창이라 빗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파리급'으로 비가 온다니. 남편의 카톡을 보자마자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작년 6월에 갔던 파리 거리의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폭우는 잊을 수가 없다. 길을 걷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미친 듯이 퍼붓던 폭우. 물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비가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한 방울, 두 방울 비를 맞고 우산을 채 다 펴기도 전에 양동이 물을 들이붓듯 그렇게 냅다 퍼부을 줄은 몰랐다. 우산이 있었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다 젖을 줄은.
'파리급으로 비 온다'는 말에 나는 대번에 밖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참 좋다. 같은 경험을 공유할 때. 지금 이 순간과 연결된 과거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때. 내 경험의 폭이 넓어졌음을 확인하게 될 때. 앞으로 비가 대차게 오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나는 6월의 파리 거리를 떠올릴 테니까.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젖은 바람이 훅 밀려들어오며 그제야 쏴- 퍼붓는 빗소리가 들린다.
'와, 많이 오네. 시원하다.'
밖에 나갔을 때는 곤욕이지만, 집에 있을 때는 비 오는 날이 좋을 때가 있다. 맑은 날이 주는 것과는 다른, 집에서 비 오는 풍경을 내다보고 빗소리를 들으며 느낄 수 있는 정취가 분명 있다. 약간의 어둑함이 주는 분위기도 좋다. 왠지 영화 한 편 보고 싶어지는 느낌.
창문을 열고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 방금 전까지의 의식의 흐름을 따끈따끈하게 기록했다(글을 다 쓰고 나니 갑자기 천둥번개가ㄷㄷ). 보통 저녁에 글을 쓰는데 아침에 글을 쓰니 성취감이 느껴져서 더 좋다.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오후에 나갈 일이 있어 비를 뚫고 힘겹게 가야겠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아봐야겠다. 내리는 비만큼이나 힘찬 하루를 보내고 싶다. 모두들 안전하고 시원하고 재밌는 하루를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