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다. 몽롱한 상태로 기척을 살핀다. 할머니는 오늘도 벌써 마당에 나가 있구나. 한 번쯤은 아침 밭일을 거들 법도 한데, 생각만 하고 못 일어난 지 몇 달째다. 원인은 저혈압 10%에 게으름 90%. 어차피 난 농사 똥손이니까… 합리화하며 두 명 치 이불 위를 넓게 뒹군다. 어느덧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일어났나.”
생선조림에 연두부국
횟밥에 시래기된장찌지개. 반찬은 물미역에 데친 두릅.
같이 아침밥을 차린다. 할머니가 다 만들고 담은 곁에다 수저나 놓으면서 생색내는 거다. 그래도 나지막한 밥상을 들어 부엌에서 안방으로 옮기는 일만큼은 내 몫이다. 할머니보다는 내가 기운이 세니까. 사실 할머니 혼자 먹을 밥상이면 애초에 이렇게 무거울 일이 없다. 다 나 먹으라고 냉장고 속까지 박박 긁느라 반찬 가짓수가 많아진 탓이지. “와,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아침부터 한 일 없어도 음식은 배 속으로 술술 잘만 들어간다.
설거지도 당연히 내 차지다. 할머니 허리가 굽어갈수록 부엌 싱크대는 까마득하게 높아진다. 싱크대 상판에 양 팔꿈치를 기대야 겨우 허리를 펴고 서는 통에 설거지 한 번 하고 나면 팔꿈치가 아프다는 걸, 내 아무리 불효 손주지만 그 꼴은 못 본다. 그치만 매일매일 당연한 일을 두고서 우리는 매번 한 마디씩 부러 섞는다. “할머니,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오냐, 니가 할래.”
그릇 다 헹굴 때 즈음 방앗간 집 할머니가 놀러 온다. “커피 드릴까요?” 물어 놓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그냥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려버린다. 찬장에서 맥심 모카 커피믹스 네 개를 꺼낸다. 방앗간 집 할머니는 믹스 두 개 그대로, 우리 할머니는 프림은 되도록 덜 넣고 설탕 두 숟갈 추가. 그리고 나는 몇 번은 같이 믹스도 먹고, 또 몇 번은 우리 할머니표 매실엑기스를 타 먹으며 익숙한 한 소리를 듣고 또 익숙한 한 소릴 건넨다. “매실엑기스 뜨신 물에 타 먹는 게 뭐 맛이 있나?” “아이고 차게 먹어도 맛있고 뜨시게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담근 건데!”
두 분은 거실 테레비 앞에 앉고 나는 주섬주섬 하루 치 여행 짐을 챙긴다. 배낭 앞주머니에는 할머니의 ‘매직 워터’ 매실엑기스 탄 찬물 한 병을 넣는다. “다녀올게요!”
할머니가 현관문 밖까지 나와 배웅한다. 마당에 묶어 둔 자전거를 털레털레 끌고 집 앞 비탈길을 내려간다. 안장에 오르면서 집 쪽을 돌아보면 할머니가 여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손을 크게 흔든다. 할머니도 손을 크게 마주 흔든다. 목청을 다시 한번 높인다. “다녀올게요!”
내가 싸돌아다닐 동안 할머니는 화분도 돌보고
밭도 일구고 정원도 가꾼다
이놈의 불머스마가 어디 싸돌아댕기나 지도 보면서 구경. (옆에 맥주는 내가 마셨다)
해가 꺾인다 싶으면 종일 쏘다니며 지친 다리를 추슬러 자전거 페달에 힘을 싣는다. 다 저물기 전 집에 도착해야 한다. 할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싫다. 저 멀리 연한 갈색 타일을 입은 울진침례교회 첨탑이 보이면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고, 마지막 박차를 가해 뛰어들 듯 귀가한다. “다녀왔습니다!” “나리 왔나.” “네!”
“오늘은 어데까지 갔다 왔노.”
“오늘은 저기 OO리 갔다가 OO리에도 갔다가…….”
“이 불머스마*가 울진 이 모태기 저 모태기 자전거 끌꼬 다 돌아 댕기네. 나리 니 꼬추 달고 나왔으면 좀 좋나.”
“아이고 됐심더, 요샌 딸이 훨~ 나아요.”
땀을 씻고 퍼질러 눕는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저녁 차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들어야지, 속으로 되뇌면서 등짝은 바닥에서 한참 떼지 않다가 겨우 수저나 좀 놓고 밥상이나 좀 든다. “할머니! 너무 맛있다! 근데 오늘 있잖아요, OO리에 갔을 때요…….”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뚝딱뚝딱 그릇을 비워 나간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KBS와 MBC 두 채널밖에 나오지 않는 안방의 코딱지만 한 고물 티브이를 같이 본다. 띄엄띄엄 보느라 미처 못 따라잡은 드라마 줄거리를 할머니에게 묻기도 한다. “저 여자는 저 남자랑 왜 싸우는 거예요?” “저 처자가 말따, 저 총각하고 서로 좋타꼬 연애를 했거든. 근데 저 처자네 어마이 자리가 사람이 아주 모질어. 그래서…….”
밤이 익는다. 할머니가 먼저 “나리야. 자자.” 하기도 하고, 할머니가 깜빡깜빡 조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 불 끌까요?” 하기도 한다. 티브이를 끄고 형광등을 내리면 순식간에 고요한 어둠이다. 굽은 허리 때문에 항상 옆으로 눕는 할머니 곁에, 나도 옆으로 마주 눕는다. 괜히 할머니 손도 한 번 꾹 잡아본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