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약속 뒤늦게나마 지키러 왔는데.
동네 마을회관 문을 열고 고개를 디밀면 못 보던 젊은 얼굴에 “국회의원 인사 왔나?” 순간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다가도, 학생이고 여행 중이라고 하면 누그러진 목소리로 “여까지 말라 왔노? (여기까지 뭐 하러 왔냐?)”라면서 썩 들어와 앉으라 손짓한다. 볕을 쬐던, 농사를 짓던, 혹은 지나가던 동네 분들께 한두 마디 말을 붙인 것뿐인데 때론 그분들 댁에서 밥을, 커피를, 간식을 얻어먹었다. 낯 모르는 여행자를 선뜻 친손주처럼 반겨주신 울진 곳곳의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 동글동글한 추억만 쌓으며 별 탈 없이 한 해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마음 따뜻한 분들 덕택이다.
오가며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라 치부하면서도 자꾸만 생각이 나서 몇 번 더 무턱대고 찾아뵈었던 분들도 있다. 금강송면 덕거리의 남계유 할아버지, 봉암농원 남명화 선생님이다. 흔쾌히 내 말동무를 해주고, 당신들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때론 끼니 신세도 지게 해주었다. 신세라면 울진엑스포공원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만난 엑스포 직원 김진태 님께도 만만찮게 졌다. 울진이 부모님 고향이라 한 번 제대로 여행 다녀보고 싶었다고, 여행 다닌 이야기로 책도 쓰려고 한다는 내 얘기에 지역 이곳저곳을 손수 안내해주셨다. 특히 두메산골 중에서도 산골짝인 금강송면 한농마을은 이분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자전거로는 도저히 다녀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다시 꼭 찾아뵙겠다고, 글 열심히 쓰고 있겠다고, 그리 떠나 놓고 몇 해가 지나는 동안 나는 삶에 쫓기고 회사 일에 치인다는 핑계로 책을 내겠다는 결심 자체를 놓아버렸다. 그래서 한번은 이분들께 번갈아 전화가 걸려와 “책은 잘 돼가고 있는가요?” 묻는데 우물쭈물 “제가 너무 바빠서요…….”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때 전화기 너머 들리는 “아…….” 하던, 실망감을 애써 누르는 듯한 침음. 그게 내내 마음에 맺혀, 결국 이렇게 쓰고 있다.
어영부영 10년이나 흘려버렸지만 그래도 약속 지켰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직접 책을 전하면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너무 늦어버렸나, 혹 노환으로 벌써 별세한 분들이 있지는 않나, 덜컥 겁이 난다. 부디 모두들 무탈하시길 바랄 뿐이다. 이제 10년 전 그때 만난 그 모든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인화해서 다시 울진으로 향하려 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찾아뵈면서, 혹 어르신들이 안 계신다면 그 가족분들께라도, 10년 전 당신들의 모습, 10년 전 내게 베풀어주셨던 그 마음을 돌려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