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런마음황구 May 26. 2021

나의 그리운 남의 고향 답사기
#14 할 수 있는 일

잊을 때까지는 잃은 게 아니므로.



친근한 장소가 낯선 얼굴을 한다. 10년 전 내 기억과 영 딴판인 오늘날 울진 곳곳의 풍경에 스멀스멀 두려운 상상이 피어 오른다. 세월의 섭리로 언젠가 할머니가 떠나고 외갓집이 영영 사라지고 나면 그 땐 정말 어쩌지. 외가라는 구심점 없이는 아마 여기에 지금만큼 자주 드나들지 못할 텐데. 가뜩이나 개발이 늦었던 동네라, 발길 뜸할 동안 이것저것 우후죽순 들어서며 빠르게 변할 테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르다 못해 서먹한 울진을 맞닥뜨릴까. 이방인처럼 불안하게 두리번대는 스스로를 발견할까. 내겐 이제 고향 같아진 이 곳을 그렇게 툭, 잃게 될까.     


4년 전,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해질녘 온양국민학교*를 찾았다. 당신께서 교사로서 가장 치열하고 가슴 벅찬 나날을 보냈으나 이제는 폐교되어 교원 사택으로 쓰이고 있는 곳. 옛 추억 속 애틋한 학교와의 42년 만의 재회는 그러나 환희와 애수가 뒤끓는 감격의 현장이 될 거란 내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교정을 차분히 둘러보던 어머니는 내내 별 말씀이 없으시다가, 어땠냐고 캐묻는 내게 한참 만에 담담히 답했다. “허망하다. 학생 하나도 없는 빈 학교가. 고향이라는 게 이제는 상상 속에만 있구나, 내 마음 속에만 고향이 있구나, 싶다.”     


내 마음 속에만 남은 고향. 씁쓸한 그 말을 곱씹으며 온양행 버스에 오른다. 괜히 폐교 앞을 서성이다 잠잠하기만 한 사위가 야속해 얼른 옆 바닷가로 발길을 돌린다. 한결 같은 파도 소리로 애써 시끄러운 속을 달래며 되뇐다. 잊을 때까지는 잃은 게 아니며, 잊지 않는다면 잃지 않는다고. 그러니 잊지 않도록 자꾸 써야 한다고. 어쩔 도리 없는 시간의 흐름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것이라고.     


기록으로 기억을 붙들고, 기록으로 기억을 나눈다. 내가 알던 울진, 내가 사랑하던 울진의 면면이 글 속에서 내내 살아있을 수 있도록. 글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혹 이 곳이 못내 정겹고 그리운 고장이 될 수 있도록. 겁내지 말고 쓰자. 겁낼 시간에, 자꾸 쓰자. 되뇐다.      




*온양국민학교

어머니는 이 곳으로 밀려났다. 박정희 정부가 당신의 모교이자 첫 교사 발령지였던 울진국민학교를 ‘반공시범교육학교’로 지정하면서, 모든 교사들은 문교부 감사와 전국반공학습발표회에 대비해 기존의 학습지도계획안을 반공 사상에 맞춰 전부 새로 써내야 했다. 그 어마어마한 분량의 서류작업을 기간 내에 소화해 내려니 수업은 매번 뒷전이 돼야 했고, 기합 빡 들어간 새내기 교사였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그렇게 대충 가르칠 수 없다’며 뻗대다 교장실에 불려 다니고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1972년 다른 반골 교사들 몇몇과 더불어 전근 명령을 받아 쫓기듯 옮겨 간 옆 동네 온양국민학교. 당시로서는 다소 낙후된 지역에 자리한 데다 막 개교를 앞둔 터라 교사들의 손길 닿을 일이 태산인, 이른바 ‘험지’였지만 새 학교를 향한 온양 동네 사람들의 뜨거운 환대와 교사들을 어미 닭처럼 따르는 아이들은 험지가 험지만은 아니게 했다. 특히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늘 씩씩한 기운을 잃지 않던, 똘망똘망한 눈을 한 이 곳 아이들은 선생으로서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불러 일으켰다.     

 

재능이 있다 싶은 아이들을 방과 후에 따로 모아다 글짓기를 가르쳤고, 몇몇은 군에서 여는 백일장에도 내보내 당당히 특선시키기도 했다. 교내 유일한 여교사라는 구실로 첫 전교 학예회 준비를 홀로 떠맡게 됐을 때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들과 뭔가 특별한 일을 저질러보자 싶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기획했다. 군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읍내의 울진국민학교에서도 ‘학예회 무용’이라고 하면 동요에 맞춰 간단한 율동이나 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패기였다. 양장점 주인을 불러다 주인공 백조 역할 아이의 튀튀를 맞추고, 기름드럼통을 여럿 엮어서 기둥 삼은 뒤 그 위로 널빤지를 깔아 무대를 만들고, 어머니 나름대로 고안한 안무로 아이들을 가르쳐 선보인 발레 공연은 온양 전체를 말 그대로 뒤흔들어 놓았노라고, 당신은 자랑스레 추억한다.     


하루하루 교사의 보람이라는 게 무언지 새롭게 배워갔던 2년여의 온양 생활 이후, 어머니는 인근의 진복국민학교로 또 대구의 몇몇 국민학교들로 전근을 다녔고, 결혼을 했으며, 1982년 교사 생활 13년 만에 퇴직했다. 세 딸 엄마 노릇과 첫째 며느리 역할에 꼼짝 없이 붙들린 동안 세월은 ‘온양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한 번 제대로 해 볼 겨를조차 주지 않고 훅 지나가버렸다. 그러다 지난 2017년 가을, 겨우 하루 날을 잡고 남편과 막내딸과 함께 이제는 폐교된 이 곳을 다시 찾았다. 자그마치 42년만의 조우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그리운 남의 고향 답사기 #13 그때 그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