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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마음황구 Jun 14. 2021

나의 그리운 남의 고향 답사기
#15 흔하고 특별한

흔해 빠진, 그러나 내겐 퍽 특별한 울진의 장면들.



1. 우리 집에 왜 왔개?


심심하게 집을 지키던 개들이 낯선 여행자를 향해 사납게 혹은 반갑게 짖는다. 제 영역을 침투한 이방인에 고양이들은 멀찍이서 경계하거나 다가와 고개를 부빈다. 외로운 여행길이 잠시 덜 외로워진다. 배낭 주머니를 뒤지며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나 쥐포 있는데 같이 먹을래? 

하지만 항구의 고양이는 쥐포 따위에 현혹되지 않았다...



2. 유모차


마을회관이나 시장 한 편에는 항상 낡은 유모차가 한 두 대 씩 주차돼 있다. 노인 전용으로 나온 보행기와 달리 차양이 달려 있는 모습에 한 때 낯모를 어린 얼굴 위로 드리웠을 은은한 그늘 따위도 떠올려본다. 누구였을까, 손주였을까 혹은 이웃집 아이였을까. 걸음 서툰 젖먹이를 태우고 부지런히 마실을 다니다 어느덧 버려졌던 유모차가, 걸음 서툰 할머니들의 보행기로 제 쓰임을 새로이 찾아 마을회관으로, 시장으로 다시 마실을 나와 있다.



3. 함박눈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울진이 강원도 소속이었다는데, 이 정도로 눈이 많이 올 거 같으면 요새도 겨울철동안만큼은 잠시 강원도로 다시 편입시켜줘야 되지 않나? 몇 년에 한 번 눈이 뿌릴까말까 하는 내륙 분지인 대구 출신은 함박눈 퍼붓는 울진의 겨울이 매번 신기해 매번 실없는 상상을 한다.



4. 서면 삼근리 새점 버스정류장 옆 슈퍼에는 퍽 탐나는 평상이 있었는데


내리막 산길을 향해 탁 트인 너른 평상에, 굴비처럼 엮어 나무에 늘어뜨려 둔 병따개. 여기 대자로 누워 맥주 한 병을 시원하게 까먹어 봤어야 하는 건데. 서면에는 늘 자전거를 끌고 왔던 터라 음주를 못하는 바람에 그 풍류 한 번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게 입때껏 아쉽다.

저 목침을 베고 한 번 누웠어야 했는데



5. 사랑하는 나의 바다


살다가 마음이 뒤숭숭해질 적엔 핸드폰 앨범을 뒤적여 울진바다 사진들을 꺼내든다. 짙푸르고 시푸른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기억 속 세찬 바람과 비릿한 짠내, 천둥 같은 파도소리를 되짚는다. 동해바다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사진만 놓고 봐서는 여기가 강릉바다인지 속초바다인지 알 게 뭐냐고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내 눈엔 달라. 무릇 사랑에 빠지면 흔해 빠진 것도 사뭇 특별해 보이는 법이잖아. 나는 종종 죽고 나면 가루 한 줌이 되어 이 바다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울진, 울창할 울, 보배 진. 

나는 어쩌다 이런 멋진 곳을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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