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기 D-day, D+1
2년간 유지해왔던 스튜디오 어시스던트라는 직책을 경기도에 내려두고
오늘 다시 완전한 서울의 백수로 돌아왔다.
다시 배부른 무채색의 직장인으로 돌아갈지
배고픈 소크라테스까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나'로 돌아갈지
선택을 조금 미뤄야겠다.
일단 오늘은 집 근처에 새로 생긴 호텔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그동안 시간이 없어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들을 브런치에 기록해두려 한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영상자료원에서 연달아 영화 보기
에어컨 바람 쐬며 80~90년대 여름 음악 듣기
오후의 늘어지는 햇빛 여유롭게 감상하기
누워서 좋아하는 완결 만화책 정주행 하기
망원동 대루커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읽기
일어나서 가장 먼저 커피부터 내려서 마시기
그동안 찍었던 사진과 영상 한 장씩 다시 보기
못 가본 국내 소도시 가보기
못 가본 일본 소도기 가보기
파리만 2주 이상 여행하기
가까운 문화센터에서 외국어 회화와 드로잉 오전 수업 듣기
오전 자유 수영하기
집 안 가구 배치 조금 바꾸기
이런 리스트 계속 만들어보고 실제로 하나씩 해보기
집 근처 새로 생긴 호텔 레스토랑에서 브런치 먹기
백수에서 새로운 직업이 생길 때까지 계속 브런치에 글쓰기
2018년 7월 31일 화요일, 폭염 10일째
오늘도 야외에서 가만 서있기만 해도 견디기 힘든 날씨가 이어진다. 그래도 스튜디오 사람들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것 중 가장 밝은 모습이라고 했다. 7월의 마지막 날이자 2년간 몸 담은 스튜디오의 마지막 날. 마치 전역하는 기분이다. 아이맥과 외장하드를 정리하고 생각나는 것들을 다른 직원에게 인수인계했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정시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 처음 입사할 때 조그만했던 정문 앞 담쟁이덩굴이 이제 내 키보다 커져 있었다.
2018년 8월 1일 수요일, 폭염 11일째
평소보다 조금 느지막이 일어나서 씻고(면도는 안 했음) 새로 생긴 선유 더 스테이트 호텔의 뚜스뚜스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아침과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까지 영향을 미칠정도의 양 많은 식사였다. 맛도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구 위치를 조금 바꿔 보았다. 스툴 위에 노트북을 올리니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 해가 질 때 다시 밖으로 나와 커트를 했다. 집 앞에 한 달 전에 생긴 작은 미용실인데 자주 가던 곳의 반 가격이다. 합정 홈플러스 문화센터의 강좌 2개와 부산에 내려갈 차표를 결제했다. 내일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하는 샤이닝은 인터넷 예매가 매진됐다. 조금 일찍 가서 현장 예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