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다 셀 수 없는 머리카락 개수처럼 많아졌다. 여름의 머리는 바랬고 가을의 눈은 더없이 깊어졌다. 하늘로 나부끼는 구름 위에서는 누군가 말없이 이 세상을 쳐다보고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하늘을 휘저어 대로변으로, 골목으로 바람을 날렸다. 산골짜기 사이로, 강변으로 바람을 날렸다.
그는 그러다 말았다. 언제까지 이 일을 반복할지 나는 모른다.
나는 이 땅 위에 서있다. 가진 것이 많지만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한 심정으로. 무언가를 가졌다는 것이 내게 안정을 줄 수 있을까? 가상에서, 아니 내 어떤 심상 속에서 나는 머리를 빡빡 밀고 다 찢어진 옷을 입고 -티셔츠와 바지 차림일지 옛사람들이 입던 장삼 차림일지는 나도 모른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 맨발로 눈물콧물 흘리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서 있다. 눈을 떠 보면 나는, 다만 내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것 없이 가을바람만 세어들 뿐이다.
1년 반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동시에 글을 쓰게 된 것이라면 잘 된 일일까. 3년 전부터 앓던 강박장애가 다시 갑자기 심해져서 날마다 통증과 윷놀이한다. 나보다 더 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의 존재가 내 입을 다물게 한다면 그건 잘 된 일일까. 집을 잠시 나갔던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방 없이 이곳저곳에 묵었던 내겐 아늑한 방이 다시 생겼고, 신앙을 두고 세상과 적당히 줄다리기하던 내겐 필사적으로 신앙을 붙잡을 이유가 생겼다. 내 마음에 결핍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가 여자친구의 존재유무와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간만에 쓴 글, 이건 내게 상당히 많은 감각들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뭔가를 자랑하지 않으며 쓴 글은 굉장히 제한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써보니 표현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어떤 글을 쓸지도 자세히 정할 수 없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정죄에 걸려들지는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린 정말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난 이대로가 좋은데, 난 아무쪼록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 마음의 크기는 작고, 어떻게 써야 할지 기도를 해도 그분이 뭐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지시해주시지 않으니, 뭘 쓸지도, 써서 뭘 어쩔지도 모르겠다. 옷걸이에 많이 걸리게 된 가을 옷들과 모자처럼 알록달록해지고 싶지는 않다. 이제 나를 생각하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그리고 내가 잘 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말을 듣고, '이 놈 뭐라는 거야. 도통 이해를 못하겠네.' 라고 다들 그러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사실이다. 더 이상은 내 명성을 위해 글을 쓰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뭘 위해 써야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