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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May 29. 2023

애도일기 ⑤ 어제 언니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엊그제는

2022년 1월 16일, 21일 일기 발췌

여행의 끝엔 각자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다시 일상으로 복구하는 삶이 남아 있다. 나는 미국 동부로, 언니는 서울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나는 울적했다. 돌아가는 길,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길을 가다 보면 내 어버이가 떠올라 남모르게 눈물 훔치는 길. 삶의 갈림길마다 나는 눈물이 난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다시 못 갈 길이라서 그렇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가 나는 돌아갈 곳 없이 정차 없이 떠돌아다닌다. 돌아가는 길엔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다. 헤어지고 난 뒤에 나는 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어제 언니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갔고 엊그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길에는 내 애환이 함께 있었고 내 슬픔이 있었고 내 언니의 다정함도 깃들여져 있었다. 나는 인제 떠나 곧 떠나 아주 떠나버린다. 내 나이 스물 중반, 이젠 좀 너그러워져도 되는 나이. 나에게 가장 너그러워지기. 내 삶에서 '나'라는 중심 잘 잡기. 언니는 나에게 대충 살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언니 말처럼 조금은 대충 살기. 그냥 살아 있는 나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기. 누군가와 함께 춤추는 법도 배우고 즐겁게 사는 법도 배우기.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밥 먹는 날들 중, 단 한 번도 같이 사진 찍을 생각을 하지 않은 나 자신이 미웠다.

일상이 계속되길 바라는 건
물 한 사발 떠놓고 비는 행위만큼이나 부질없는 기원이었어.

나는 여기에 와서 저기로 떠도는 나그네야, 나그네. 반가운 손님이 온 모양이구나, 버선발로 뛰쳐나가 저리 처신머리 없이 움직이는구나. 손님은 가고 나는 여기 남아 다시 서글퍼지는구나.


할머니, 우리 아버지를 창시한 행물학적인 어머니이자 귀염둥이 막내아들에게만 남 모르게 먹을거리를 좀 챙겨준 의혹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형제들 몰래 뭐라도 더 챙겨준 탓인지 우리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장성해서 장군 같이 단단한 뼈와 골격과 장신의 키를 지녔다. 그래서 몸 쓰는 일을 잘했고 험악한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의 몸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장수의 피를 타고 태어나 힘을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몽땅 쓰고 기력이 쇠해 죽었다, 이것이 내가 내린 그의 죽음 원인 탐구에 관한 결론이다. 나는 그에게 자랑이고 희망이고 미래였다. 장례식에 온 모두가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자랑했는지 일러주었다.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 내가 밟아온 발자국을 아버지는 모두 기억하고 두고두고 자랑했다.


아버지의 가족은 나에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제적 결핍을 어린 시절에 몸소 경험하고 자라 나에게 뭐든지 해주고 싶어 했다. 중학교 졸업 선물로 받은 캐논 카메라, 대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13인치 맥북, 대학교 2학년 때 이유 없이 사달라고 조른 아이패드, 2학년 여름방학 때 길바닥에 돈과 시간을 버리고 다닌 강남 토플 학원, 그해 겨울방학 때 떠난 뉴질랜드 어학연수, 나는 아버지한테 종종 뭘 사달라고 졸랐고 아버지는 대체로 엄하게 절대 안 된다면서 으름장을 내놓으면서도 해줬다. 다만, 아버지는 내가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만은 결사 반대했다. 대신, 서울에서 공부하면 뭐든 다 해주겠다고 했다. 학비와 생활비 전부를 대 줄 테니 서울에서 공부하라고 했다. 가족은 가까이 살아야 가족이지, 먼 곳으로 가면 가족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을 실감했다. 할머니, 우리 가족의 뿌리이자 기둥이 쓰러졌건만 나는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다. 미국이라는 땅에 발이 묶였다. 가지 못해 애달퍼졌다. 그들이 보낸 부고 안내장엔 내 이름은 없었다. 언니의 이름은 있었고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녀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제거함으로써 나에게 불명예를 주었다.


할머니, 평생 불교에 귀의하신 그녀의 발자국엔 업보가 서려 있을까, 없을까? 그녀는 집 안에 불당을 세우고 무릎 끓고 앉아 자신의 무지함을 매일 고백했다. 그녀는 한국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 국민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한 세대이다. 그녀가 늦은 나이에 겨우 한글을 익혔을 때 그녀의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학습지에 이리 답했다.

종교에 의하여, 기대며 살아가지요.

고모는 할머니가 돌아가기 직전에 개종했다고 전했다. 그녀가 사탄과 싸우다가 가셨다고 한다. 고모에게 죽음은 사탄이었다. 나에게 죽음은 카르마였다,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인간은 살아간다.

대체 텍스트: 기다란 뿔을 가진 흰 염소 두 마리가 잔디밭에 앉아 있다. 그들 옆엔 나무 더미가 있다.

상황 설명: 첫 학기가 끝나고 언니와 함께 미주 여행을 떠났다. 신나게 놀고 집에 가는 길에 느닷없이 할머니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을 받았다. 나는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다시 날아가는 길에 나의 부족함에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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