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에 태어난 나는 2014년 5월,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9년을 연애하고 결혼한 지 1년 만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품에 안았다. 낯설지만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운 좋게도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아이는 큰 탈 없이 자라주었고, 나는 비교적 빠르게 휴직을 결정하며 '임신'이라는 시간에 집중했다. 요가, 그림, 영화, 음악, 책, 여행.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태교'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누렸다. 몸과 마음이 평온했던 20대의 끝에서 시작한 육아는 새롭고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매일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출산 전의 세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만으로 지내왔던 날들이었다.
첫째가 백일이 지나면서 우리는 거의 매일 공원으로 나갔다. 건널목만 건너면 올림픽공원이 있었고, 나는 sns에 '#1일1올팍'을 기록하곤 했다. 매일 다른 햇살, 구름, 바람, 비, 눈. 그 속에서 나는 계절을 느끼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 시절,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육아가 내게 맞는 옷 같다고 생각하며 지내던, 첫째가 4살이 되었을 때 예상하지 못한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둘째가 생겼다. 기쁨과 두려움, 설렘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다. 두 아이를 품에 안으며 나는 흔히들 말하는 '금메달 엄마'가 되었다. 딸과 아들을 모두 둔 엄마에게 주위에서 농담처럼 건네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이가 한 명이었을 때와는 다르게 둘이 되니 비로소 진짜 가족이 완성된 것 같았다. ‘완전체’가 된 가족 덕분에 든든한 마음이 커진 만큼, 우리 부부에게 닿는 책임감과 부담도 덩달아 커졌다. 아이가 하나 더 생기면 두 배가 아니고 곱절로 힘들어진다고 하더니, 그 말에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 살 터울의 아이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은 쉽지않았다. 감사 대신 불평이, 여유 대신 불만이 들어찼다. 우울한 마음이 찰랑거리다, 끝내 깊은 슬픔이 나를 덮쳤다.
2018년 9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돌도 안된 우리 집 막둥이에게 병명이 생겼다. '난치성 뇌전증을 동반하지 않은 상세 불명의 뇌전증'.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내게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건, 끝없는 불안을 품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잔잔해 보이는 강물에서 언제 덮칠지 모르는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았다. 모든 것을 조심하고, 위축된 채로. 사방을 살피느라 잔잔한 일상조차 두려움으로 변했고 몸과 마음의 평화는 사라졌다. 아이가 피곤해 보이는 날이면, 나는 마치 방패를 든 기사처럼 잔뜩 긴장했다. 공격을 막아내겠다고 늘 신경을 곤두섰지만, 실은 그 창들은 막을 수 없었다. 매일 아이의 숨결을 살폈다. 매일 불안 속에서 눈을 뜨고 불안 속에서 잠들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 바로 몇 분 전, 아이들도 뒤척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한밤중에 온 집을 실컷 여행하다 발밑에서 자고 있던 둘째가 실눈을 뜨곤 뒹굴뒹굴 굴러와 나에게 안긴다. 귀여운 아이를 안아 쓰다듬어주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우리의 깨 볶는 소리를 들은 큰 아이도 곧 데굴데굴 굴러와 내 품에 찰싹. 마치 완성된 퍼즐 같았다. 그제야 깨닫는다. 평범했던 보통의 날이 얼마나 감사한지. 별일 없는 아침, 무사한 하루. 불안을 감사로 바꾸자 아이가 대견했고 고마웠다. 그렇게 내 일상은 다시 ‘감사’와 ‘행복’으로 채워졌다. 힘들고 고단한 날에도 스치듯 지나가는 행복은 있다. 순식간에 지나갈 때도 있고 여운이 오래 갈 때도 있지만 찰나에 지나가는 소소한 행복들을 놓치지 않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찰나에 피었다 사라지는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마음이 조금씩 자라 내 하루를 채우고, 누군가의 하루에도 닿기를 바랐다. 그렇게 내 작은 바람을 담아 '찰나의 행복 찾기'를 시작했다. '#찰나의행복함께해요' 이제, 나만의 해시태그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