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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16. 2023

괘씸한 철학번역 5

idea, substance, reality에 대한 철학번역

번역가들의 잡지 <번역하다>에

연재한 글입니다.


괘씸한 철학번역 5


말은 글과 다르다. 하지만 말과 글의 간격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번역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철학번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말에 쓰이지 않는 언어는 글로도 선호하지 않는다. 소수가 지식을 독점하는 시대마다 글과 말은 동떨어져 있었다. 지식의 권위를 좋아하는 자들은 언어의 선택과 사용에서 마치 자신의 권위를 표현하듯이 글을 쓴다. 그런 글이 말과 다르다는 것에 만족하듯이 난해함에 안주한다. 철학의 이름으로든 인문학이라는 슬로건이든, 지식으로 타인을 계몽하려면 말하는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그들의 무의식 또는 의지에 나는 동참하지 않는다.


말은 타인을 배려하는 언어이다. 상대방이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화자는 상대방의 이해 수준과 공감의 정도를 살필 수밖에 없다. 말의 세계에서는 화자의 이야기가 청중에게 얼마나 잘 전해졌는지가 관건이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배려와 소통에 도움된다면 새로운 언어가 발굴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해치는 언어는 도태된다. 그러나 독자가 직접 나타나 있지 않는 글의 세계에서는 독자보다 글쓴이의 생각이 어떻게 잘 표현되는지가 관건인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아도 글은 써진다. 그런 글에 권위라는 도장을 찍으면, 이해되지 않는 글이라도, 그 권위의 크기에 비례해서, 저자의 책임은 줄어든다. 그 대신 독자는 자기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자책한다. 어떻게 공부하면 ‘그 어려운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런 무책임 혹은 책임 전가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걸까? 


칸트는 한국어를 몰랐다. 한자도 일본어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철학 교사들 혹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치 칸트가 ‘그런 한국어’ 또는 ‘그런 한자어’를 사용해서 자기 생각을 표현한 것처럼 착각한다. 이런 내 지적이 옳든 옳지 않든, 지금까지 전승된 우리말 번역이 칸트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 번역의 권위에 자유롭게 도전해도 좋을 것이다. 칸트 철학을 알기 위해 칸트를 읽는 것이지, 번역자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칸트를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칸트 철학이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철학이라면, 이는 한국인뿐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인류사에 어떤 공적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해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은 자명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현대 인류의 정신세계로 입문하는 거대한 문이 바로 칸트 철학이었다. 현대 인류는 칸트가 설계한 지적 세계에서 진화해 왔다. 그러므로 원래 철학이 어려운 것이며, 본래 칸트가 난해하다고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우리말 번역을 성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순수이성비판>을 포함해서 칸트의 저작에 대한 한국어 번역본은 우리말의 무덤이었다. 그것은 한국어 조문으로 가득한 칸트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과연 칸트만 이러할까?


단어마다 갖는 위상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한다. 그 위상은 의미 모호성(명백하거나 의심스럽거나), 난이도(쉽거나 어렵거나), 정합도(의미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오해 가능성(의사소통에 이익이 되거나 장애가 되거나)이었다. 각 단어의 위상값(Wp)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숫자가 커질수록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고, 어렵다는 것이며, 잘못된 번역일 수 있다는 것이고, 소통에 불리하다는 의미이다. 어느 항목이든 3~4에 해당하는 점수가 하나라도 있으면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경우 대안을 탐색해야 한다. 


idea

순수이성비판에서 ‘idea’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머릿속 생각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에는 ‘관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순수이성의 개념 형식을 뜻하는 것으로 콕 집어 쓰이기도 하는데, 그때의 뜻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 용어인 그 <이데아>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감성, 지성, 이성이라는 고유한 능력이 있다. 감성은 경험 데이터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안으로 수용한다. 지성은 감성이 수용한 경험 데이터에 개념이라는 형식을 적용해서 판단한다. 이성은 지성 개념을 이어 붙이며 추론하는 능력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더 큰 원리에 관심을 갖게 해준다. 칸트는 지식에 관한 한 경험주의자였다. 앎이라고 하려면 감성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칸트가 생각하기를, 인간의 이성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개념만으로 그것들을 이어 붙이면서 제멋대로 원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경험이 모두 달라도 인간은 하나같이 ‘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우주는 시작과 끝이 있다’, ‘나는 죽어서 다음 세계로 갈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신, 우주, 영생이라는 관념은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었다. 이성이 경험의 도움 없이 자기 멋대로 만들어 낸 생각이었다. 칸트는 이런 이성의 생각을 일컬어 오류라고 했다. 지식이라거나 진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오류였다. 칸트는 12개의 지성 개념에 ‘범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면 이런 ‘불가피한 오류’를 낳는 이성 개념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줘야 하는가? 칸트는 고민 끝에 플라톤의 용어, ‘이데아’를 차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칸트 교사들은 옛 일본 학자의 적통을 이어받아 ‘이념’으로 번역한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보통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그 이념이 아니다. 좌우 이념, 이념 대립의 그 이념도 아니며, 건국 이념이나 통치 이념의 이념도 아니다. 그럼에도 같은 단어를 썼으니 용어의 ‘다른 의미’가 칸트 철학의 ‘이념’이라는 단어에 섞이고 말았다. 이런 현상을 칸트가 얼마나 걱정했던지! <순수이성비판> B369 단락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 말의 어휘가 매우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념에 꼭 맞는 표현을 자주 찾지 못하고, 이런 결핍 때문에 타인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올바르게 지식을 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 내는 일은 무례하게도 언어를 입법하는 것이어서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의심스러운 방법에 의지하기 전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를 둘러보면서 이 개념(순수이성의 개념)에 적합한 표현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고대의 표현이 그 표현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다소 불안정하게 쓰였더라도, 스스로 단어를 만듦으로써 우리 기획을 이해 불가능하게 망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옛 표현의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더 낫다. 이런 이유로, 만일 하나의 개념에 하나의 단어만이 발견되고, 그 하나의 의미에서 그 단어가 이미 소개되어 있는 데다가, 이 개념에 정확히 맞는다면, 또한 만일 다른 연관 개념들로부터 순수이성의 개념을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면, 그런 단어를 남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단어가 쓰이는 곳에 동의어나 대체 용어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고그 알맞은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표현이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아주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다른 단어들의 더미 속에서 고유한 뜻이 상실될 때, 그 표현만이 지켜낼 수 있는 사상도 상실하게 되는 일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칸트는 몇 페이지에 걸쳐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평한다. 결국 ‘idea’는 ‘이데아’로 번역해야 한다. 그것이 칸트가 원하는 번역이다. 순수이성의 개념은 다른 단어와 섞이지 말아야 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그 ‘이데아’가 바로 연상돼야 한다. 그럼에도 일본 학자들이 제멋대로 ‘이념’으로 번역했던 것이다. 물론 플라톤을 번역하면서 ‘이데아’를 모두 ‘이념’으로 통일해서 번역했다면 칸트의 의도가 왜곡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를 일컬어 이념으로는 칭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곳마다 칸트가 전하려는 순수이성의 개념이 제대로 연상되지 않는다.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의미가 명료하게 전해지지 않는 매우 모호한 단어이다(3점). ‘이념’이라는 단어 자체는 용법을 떠올리거나 사전을 찾아보면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2점). 그런데 번역은 저자의 명시적인 메시지를 정면으로 무시하였다(4점). 이런 번역 때문에 칸트와 플라톤이 잘 연결되지 않는 혼란이 누적돼 왔다(3점). 그러므로 ‘idea에 대한 번역어 ‘이념’이라는 단어의 위상값은 다음과 같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위상값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idea’는 ‘이데아’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물론 칸트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난이도가 있다. 하지만 다른 번역은 있을 수 없다.


(중략)


철학자들은 난해하고 모호한 단어 대신에 쉽고 자명한 단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독자들이 철학자들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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