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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Mar 31. 2024

24.03.31

사막에 서면

누군가는 모래 아래 묻힌 옛 집터를 떠올리겠지. 낡은 벽과 밥상과 그릇과 그릇에 담긴 음식의 온기, 그 모두를 빙 둘러 피어난 생활을. 슬픔으로 떠올리기도 하고 아련함으로 떠올리기도 하고 그리움으로 떠올리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떠올리기도 하겠지. 감정은 여럿이겠지만 거기 묻힌 생활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사막에서도 이야기를 빚는 이.

그중 누군가는 말들을 발굴하겠지. 오래 묻혀 형체도 없이 스러진 소리들을 그러모아 말을 빚겠지. 모래에서 말을 빚어내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다시 파묻을 생각 따윈 하지 않겠지. 말은 허겁지겁 내일로 전해질 것이다. 사막에서도 성대가 온전한 자.

그중 또 누군가는 이내 사막의 색에 눈을 뺏기겠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천천히 떨어지는 금빛에 마음을 사로잡히겠지. 어디서도 피지 않는 꽃이나 귀신으로도 자욱 남기지 않은 머리카락을 떠올리겠지. 그이는 사막에 잡아먹힌다. 환상이 모래 무덤 속으로 초대하여 살아서도 잠들어서도 사막을 헤매겠지. 사막의 빛으로 남을 이.

그러다 또 누군가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겠지. 만져본 적도 없는 별들을 떠올리겠지. 닿으면 불타오르는 대기나 핏방울이 얼어붙는 냉기를 뛰어넘어 아득하고 막막한 공허에 마음을 두겠지. 그이는 고독하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허무로 한발 한발 내딛는다. 사막에서 사막을 떠나는 이.

나는? 나는 그저 사막에 선다. 고요에. 황금바늘이 지나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에 깃든다. 나는 사막이 된다. 고요가, 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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