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끊임없이 도피하려고 했던 아버지는 분명 두 번째 아버지, 바르고 시간을 엄수할 것을 요구하는 가부장이다. '종소리가 더는 아침을 놀라게 하지 않는 곳'에서 디킨슨은 심지어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을 표현했다. 바이런의 주인공 같은 아버지는 너무도 독선적이어서 그가 죽은 뒤에도 디킨슨은 '나는 밤마다 아버지 꿈을 꾼다, 항상 다른 꿈을. 그리고 내가 낮에 무엇을 했는지 잊어버린 채, 그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한다'라고 썼다. 에밀리 디킨슨의 바르고 엄격한 공인이었던 아버지는 너무나 강력해서 디킨슨은 아이러니하게도 탈출을 염원하는 자신의 기도를 아버지, 즉 그녀가 피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에게 바쳤다. 죽음을 에덴처럼 묘사하면서 디킨슨은 소녀처럼 '제발 아버지, 빨리요!' 하고 외친다. 이 아버지는 점점 '마르고 건조하고 말 없는' 에드워드 디킨슨에서 하느님 아버지, 천국의 가부장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한낮의 연설가와 다락방의 미친 여자 중 누가 더 예술적일까. 이런 질문은 매우 부적절하지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라는 다락방에 갇혀 탈출의 꿈을 꾸며 서서히 소멸해가는 생명을 떠올린다면.
19세기 여성은 조금씩 사회활동을 하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사회의 굴레에 갇혀 있다. 그녀들이 속한 사회의 통념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기에 그들은 창작이라는 꿈을 위해 자신을 안전지대에 묶어 두어야 했다. 그러나 분명 영민하고 자유로웠던 그녀들의 영혼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계속 탈출을 꿈꾼다. 지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영리하게 가부장제의 신화를 폭로하거나 꿈에 들뜬 듯 영혼의 두드림을 종이 위에 옮기기도 한다. 사람하고 닿는 것을 극단적으로 무서워하며 점점 자신을 다락방에 유폐시켰던 언덕 위의 에밀리 디킨슨은 그녀들의 거울 속 자화상이다. 반쯤 열린 문으로 바깥의 위험을 예감하며 파멸과 분노로 써 내려간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20세기의 여성들이 읽는다. 그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19세기의 여성들보다 자유롭고 안전하지만 과연 그럴까.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다락방의 창문으로 기우는 햇빛의 잔영을 바라보며 메아리치는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 감금과 억압, 탄압과 강요,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크게 상하는 육체에 갇힌 영혼이 창작을 한다면 결과는 안으로 향하는 울림이다. 내향적인 폭풍이 몰아치는 목소리, 정직할 수밖에 없는 여성 작가의 작품들은 아직도 남성적인 세계의 기준으로 저평가 받는다. 남성 작가들이 교육받은 언어로 머릿속에서 직조하여 세계를 성찰한다면 여성 작가들은 이미 몸으로 세계의 폭력을 경험하였기에 그녀들의 언어는 태생적이며 본질적이다. 그리고 여성 작가들의 언어는 세계와 불화하고 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읽으며 나는 작은 주먹을 느꼈다. 늑골을, 횡격막을, 폐를, 근막을, 콧대를, 머릿속을 끊임없이 콩콩콩 두드리는 조그만 주먹을. 두드림이 격렬해질 때 노트를 펼치고 시를 쓰겠지. 두드림을 탁본하면 거기 지도가 있다. 독재와 전쟁, 폭력과 갈등으로 얼룩진 금이 간 세계가. 우리의 언어는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