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을 보고
로미엣과 줄리엣의 현대 버전. 사람들은 흔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두고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셰익스피어 풍의 비극적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불평등, 빈곤, 폭력, 인종 갈등 등,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중반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1957년에 초연된 이 뮤지컬이 현재에도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으며, 2021년 스티브 스필버그의 감독으로 리메이크된 버전도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관객에게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여 아쉽지만 말이다.
마리아와 토니는 1950년대 중반의 뉴욕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살고 있었다. 현재는 링컨 센터를 중심으로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지역이지만, 당시에는 낙후된 슬럼가였다. 영화의 첫 씬에서 볼 수 있듯이 링컨 센터의 건축을 포함한 도시 재개발 사업을 위해 허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보금자리였을 것인 건물들이 철거되어 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속된 말로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고 불리는 백인 빈곤층 청년들은 폐허 속에서 방황하며 폭력을 일 삼고,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은 같은 사회적 약자 처지에 놓여 있는 서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은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에게 칼을 켜눈다. 물론 그들은 서로가 더 나은 형편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인 마리아는 자신의 오빠가 백인들과는 달리 평생 차별당해왔다고 주장하지만, 토니는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도 나을 것이 없으며, 마리아와 그의 오빠와는 달리 제대로 된 가족조차 없다며 반론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스코어를 천재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모든 넘버가 독창적이고, 음악적이며, 기묘하게도 남미와 미국의 정서를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하다. ‘투나잇(Tonight)’, ‘아이 필 프리티(I Feel Pretty)’ 등 주옥같은 명곡들을 2021년 버전 영화로 만나보니 반가웠지만, 영화를 보며 신선하게 다가온 곡들은 뜻밖에도 ‘아메리카(America)’와 ‘오, 크럽키 경관님(Gee, Officer Krupke)’였다. ‘아메리카’는 미국에 적응하여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이민자들과 미국에서 타자에 불과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푸에르토리코를 그리워하는 이민자들이 설전을 벌이는 내용인데, 여성 배우들이 두 입장을 모두 전달하는 오리지널 뮤지컬과는 달리 스필버그의 영화 버전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이 전자의 입장을, 남성 캐릭터들이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고향에서나 타지에서나 타자임은 다를 것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누릴 것이 더 많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여성 이민자들과는 달리, 고향에서는 주류로서의 삶을 살았던 남성 이민자들이 처음 겪어보는 사회적 차별 탓에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기 더욱 어려워하는 경향성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왔다. 스필버그 역시 이러한 점을 포착하여 디렉팅을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오, 크럽키 경관님’에서는 취조 차 경찰서에 끌려간 제트파 청년들이 경찰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경찰관, 판사, 의사, 사회복지사 등을 익살스럽게 연기한다. 그들의 연극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가 어려운 가정환경 탓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판사는 그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명하고, 정신과 의사는 그들에게 ‘사회적 질병’이 있으니 사회 복지사를 찾아가라고 처방하고, 사회 복지사는 다시 ‘본성이 악한’ 그들이 감옥에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시스템은 마약 중독자 부모 밑에서 자라 오갈 곳이 없어 결국 갱단에 들어간 청년들을 돌고 돌아 감옥에 보낼 뿐, 어떠한 종류의 예방책도 내놓지 않는다.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의 ‘개연성 없는’, ‘부도덕한’,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러브 스토리에 적잖이 실망한 듯 보인다. 어떻게 마리아는 오빠를 죽인,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토니와 감히 야반도주를 계획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뮤지컬이 아직도 같은 내용으로 수십 년째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회적 갈등과 이로 인해 비롯되는 딜레마이지 탄탄한 사랑 이야기나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수 집안 남녀가 첫눈에 반해 비극을 맞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이미 1500년대에 셰익스피어가 설득력 있게 전달한 바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를 기반으로 개인 간의 낭만적 사랑을 넘어 우리 사회에 결여된 사랑과 포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백인 청년들과 푸에르토리코 청년들은 마리아가 토니를 잃고 절규하자 그제서야 함께 토니의 시신을 들고 행진함으로써 화해한다. 이미 너무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고, 많은 고통이 있은 뒤다. 이러한 잘못을 2020년대에 접어든 지금까지 반복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고전 뮤지컬을 리메이크하며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일 것이다. 완벽한 음악과 미장센, 냉소적인 유머, 강력한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를 원한다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달콤하고 도덕적 갈등이 없는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디즈니 영화를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