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를 보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나 이상 구독하고, 영화 티켓 한 장에 적게는 만 천 원, 많게는 만 오천 원에 달하는 요즘 세상에서 나 같은 짠순이가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두 번 찾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미나리를 두 번째로 보기 위해 다시 한번 극장을 찾았다. 그만큼 감명 깊게 보았고, 다시 한번 곱씹고 싶은 영화였다. 하지만 이런 류의 예술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수상 소식에 영화관을 찾은 관람객 중 많은 수는 극장을 나서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듯했다. 인터넷에서 후기를 찾아보아도 ‘좋았다’는 평보다는 ‘잘 모르겠다’라는 평이 더 우세하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왜 내가 이 영화를 좋게 봤는지, 이 영화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의 플롯을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은 가치관 차이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가족 간의 갈등이다. 어쩌면 관객들이 이토록 식상한 플롯 구조와 스토리라인을 가진 영화를 식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출 기법 또한 화려하지 않아 볼거리도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는 ‘어디에서 본듯한’ 이 플롯이 할리우드 영화로서는 매우 참신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영화 중 가족을 주 소재로 다루면서도 코미디나 액션을 가미하지 않은 영화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가? ‘가족’이라는 단순한 소재와 플롯, 심하게 가공되지 않은 연출과 미장센은 제한된 제작비와 열악한 촬영 조건에 대한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것을 넘어서 ‘오직 내재적인 것, 심층적인 것으로 승부를 보겠다’라는 감독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이작 리 감독이 영화 속에 내포시킨 ‘내재적, 심층적’인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소수자 혐오에 대한 반기이다. 미국은 이민국 가임에도 불구하고 비백인들의 이민과 정착을 꾸준히 일종의 병폐로 보는 듯 해왔다. 암묵적으로 퍼져 있던 사고방식은 인종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수면 위로 드러났고, 이민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특히 백인중심적인 할리우드에서 주연배우 전부와 감독이 모두 아시아인이며, 아시아의 문화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도발적이다.
할머니 순자는 한국으로부터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미나리의 씨앗을 한국으로부터 들여와 심는다. 화재로 전소된 다른 식물들과는 달리 미나리만은 ‘대충, 아무렇게나’ 심었는데도 불구 ‘아무데서나’ 꿋꿋이 살아남는다. 외래종 미나리는 이민자들을 상징하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미나리의 특성은 역경과 혐오 정서에도 불구, 이민자들이 꿋꿋이 살아왔으며 또 살아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준다. 폭력적인 문화 현상을 이토록 ‘잔잔한’ 어조로 맞받아친 것은 우아함과 고상함 그 자체이다. 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잔잔한 톤이 더욱 빛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나리가 일방적으로 이민자의 입장에서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역시 충분히 조명한다. 한국계 미국인 손자 데이빗은 할머니 순자에게 ‘한국 냄새’가 난다며 순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순자는 아시아인과는 다른 체구의 미국인들을 바라보며 “어머, 너무 뚱뚱하다”며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 한편 교회에서 만난 백인 남자아이는 데이빗에게 “너의 얼굴은 왜 이렇게 납작하니?”라며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미스터 이’ 역시 서양의 종교와 미신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폄하하다 결국 우물이 말라버리는 결과를 맞는다. 그러나 이러한 ‘다름’이 반드시 ‘분열’을 야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미나리’는 똑똑히 보여준다. 데이빗은 순자와 시간을 보내며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게 되어 결국 심장병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위기의 순간에 할머니를 구한다. 백인 남자아이는 데이빗의 집에 물이 끊겼을 때 데이빗을 자신의 집에 품어준다. 무신론자인 듯 한 미스터 이는 매우 독실한 크리스천인 폴과 좋은 동료가 되고, 미국인들의 풍습을 따라서 새로운 우물을 파게 된다. 문화 간의 충돌 끝의 타협, 화합, 그리고 연대가 자아내는 감동은 분명 어떤 관객들이 말하듯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여기까지 보면 이 영화가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로 보이겠지만 분명 이 영화에는 ‘미나리’와 ‘고춧가루’ 외에도 한국적인 요소들이 다분하다. 순자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게 오줌을 먹이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치는 손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자 그를 아낌없이 품어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순자는 중풍으로 반신마비의 상태가 된다. 이는 묘하게 1900년대 초, 중반, 우리의 선조들이 자신들의 청춘과 건강을 희생하여 우리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준 것과 닮아 있다. 반신마비가 된 뒤에도 자식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자 순자가 쓰레기를 태우는 모습은 지극히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다. 그리고 이때 사고가 발생한다. 불길이 활활 타올라 창고까지 옮겨 붙어 미스터 이의 그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견해의 차이로 갈라서기로 한 두 부부는 서로를 ‘지영 엄마’, ‘지영 아빠’가 아닌 ‘여보’라고 부른다. 이 역시 한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알아챌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 다이내믹의 변화이다. 미국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한국 관객, 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는 관객들을 위해 숨겨놓은 이스터 에그를 찾는 것 역시 이 영화의 묘미이다. 또한 이러한 희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또 모든 것을 잃고서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는 한국적인 것도 미국적인 것도 아닌 국경을 초월한 서사일 것이다.
장황하게 설명하였지만, 사실 어쩌면 내가 이 담백한 이야기에 이토록 공감하는 이유는 나의 할머니가 생각나서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을 타지에서 보낸 나에게도 순자와 같이 한국 음식을 먼 곳까지 한 보따리 싸들고 와서 6.25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가 한국인임을 상기시켜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순자를 보며 나를 너무나도 사랑해주었고 또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할머니가 생각나서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또 어쩌면 이국 땅에서 자식들을 가장 우선시하고, 어떻게든 적응해나가는 어머니 ‘모니카’의 모습에서 그 당시 나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딸 ‘앤’이 같은 어린아이임에도 남동생 ‘데이빗’에 비해 부모님과 할머니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모습에서 수많은 한국 여자 아이들의 모습이 보여서 연대감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한국 가정에서 자라났거나 한국 사회에서 생활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높은 확률로 ‘미나리’ 속 인물 중 누군가가 나 또는 내 주변인들과 닮아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중 한 캐릭터에게만 감정을 이입해보아도 내가 느낀 감동을 함께 느끼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