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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 Jun 08. 2021

선우예권 피아노 리사이틀

6/5 아트센터 인천 공연

선우예권이 이번 리사이틀을 마치고 아예 앙코르 곡을 연주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비난하는 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데카에서 첫 음반 ‘모차르트’를 발매한 기념으로 1부에서 모차르트의 곡들을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였고, 2부에서는 그만의 개성을 갖춘 쇼팽을 보여주었다. 모차르트로 시작해서 쇼팽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쇼팽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이중창을 주제로 작곡한 변주곡으로 끝을 맺는 레퍼토리의 구성 역시 깔끔하며 재치 있는 선택이었다. 특히 모차르트 소나타 8번에서 보여준 다이내믹 및 타이밍 조절, 쇼팽 녹턴 Op. 55 No. 1의 도입부를 ‘뚜벅뚜벅’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들과는 달리 ‘성큼성큼’ 연주하는 해석, 그리고 쇼팽 Op. 2에서 보여준 비르투오시티가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흠잡을 곳 없는 연주를 마치고 그는 사상 초유의 앙코르를 선보였다. 연주 시간이 40분에 달하는 쇼팽의 24개의 프렐류드를 전부 연주한 것이다. 이와 비견할만한 앙코르는 1998년 BBC Prom에서 예프게니 키신이 자신의 리사이틀을 마친 후 50여 분 간 진행한 전설의 앙코르 공연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선우예권이 앙코르 곡을 소개하자 객석에서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 심지어는 비명소리와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인사까지 들려왔다. 이어진 그의 연주는 황홀했다. 중단 없이 연주한 프렐류드 1번에서 24번은 쇼팽이 의도한 것과 같이 24곡의 하나하나의 독립적인 전주곡이 아닌 하나의 유기성 있는 곡과 같이 들렸다. 감히 말하건대 테크닉적으로도, 해석 측면에서도 여느 쇼팽 콩쿠르 우승자에 뒤지지 않는 연주였다.


한국에서는 시인 피천득의 손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는 무대공포증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 직전 대기실에서 너무 긴장한 모습을 보이자 악장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너의 편임을 잊지 마라.’ 그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공연을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은 나의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팬이거나, 클래식 애호가이거나, 동료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나를 응원하기 위해, 또는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은 것이다. 그 누구도 나의 연주를 판단하거나 심판하려고 온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무대에서 긴장이 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린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너의 편이야’라고 말이다.”


효과적인 무대공포증 극복법일 있겠지만 나는  악장의 말이 딱히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 청중들은 오직 좋은 사운드를 듣기 위해 화려한 무대 장식이나 폭죽  시각적 효과가 전무한 클래식 음악 공연장을 찾는다. 최상의 소리 전달을 위해 박수를 치는 타이밍도 까다롭고, 흥이 돋는 부분에서 맘껏 소리를 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들은 좋지 않은 연주를 결코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는다. 완벽한 연주에는 기립박수를 보내는    실수가 없어도 평이한 연주에는 예외 없이 뜨뜻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이번 선우예권 리사이틀에서 내 옆 자리에 앉은 젊은 남성 관객은 잘 다듬어진 모양새로 연주회장을 찾았다. 본 공연 중 그는 선우예권의 연주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원체 점잖은 사람이어서인지 큰 소리를 내어 박수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어떤 곡이 끝났을 때는 아예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프렐류드 24번의 마지막 세 개의 레를 듣고서는 거의 관객 중 가장 먼저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며 오랜 시간 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선우예권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던 한 관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선우예권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무상 서비스’에 해당되는 앙코르 공연에서 본 공연 이상의 스케일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키신만큼의 입지를 가진 대가도 아니고, 신예 연주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연륜이 있는 선우예권의 입장에서 과도한 팬서비스는 자칫 그의 ‘몸값’을 평가절하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아낌없는 연주를 통해 소위 ‘몸값’이나 ‘평판’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대중음악 가수들에 비해 클래식 음악가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충성을 바칠 팬들이다. 나 역시 선우예권에 대해 사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라는 것 외에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난생처음 간 그의 리사이틀에서 나는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진솔한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난 앞으로 ‘그의 편’으로서 그의 커리어를 주목하고 그의 연주를 챙겨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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