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은 어쩌면 청각이 아니라 후각이 아닐까.
3시간마다 밥 챙겨주는 신생아 시절 동안 나는 아기가 아닌 다마고치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인스타에 보면 50일만에 통잠 자는 아이들도 널렸던데 우리 아가는 통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좀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으로 그리도 잠을 좋아하는 내가 이 악 물고 버텼다.
그와중에 모유수유를 하겠다고 유축과 직수를 번갈아 가면서 체력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이윽고 올(ALL) 직수에 성공하여 조금 살만해지는 건가 싶었지만,
너무도 육아에 집중하느라 칩거 생활을 이어간 탓에 부족한 운동량과 잘못된 식이습관으로 몸이 많이 상했었다.
남들은 새벽수유 잘만 끊던데 끝끝내 이어가면서도 부랴부랴 규칙적인 운동과 개선된 식습관으로 늦은 만큼 속도를 내어 몸을 회복해 나갔다.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 하에, 운동 시간도 생기고 나만의 시간도 짬내어 육아에 적응하는 것 같다고 안도할 무렵, 이유식 시기가 찾아왔다.
개인적으로 모유수유보다 이유식에 대한 환상과 로망이 컸고, 실제로 만족도도 높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였다.
공부하기, 이유식 만들기, 하루 전 다음 날 식단 구성해 놓기,
전쟁통 같은 이유식 먹이기(잘 먹지만 아직 미숙해서 품과 에너지가 상당히 든다), 치우기 등등.그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새벽에 잦은 깸과 함께 종달기상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찾아왔다.
새벽수유를 끊고 잠만 재우고 있는데(새벽 수유는 실제로 끊어도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건지 새벽에 한 두 번 이상 깨고, 한 번 깨면 쉽게 자지 않는다.
겨우 재워도 새벽 4~5시 경에 일어나서 안 자고 버티는 아가를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억울함을 마주하게 된다.
막수 때도 잘 먹였고, 낮잠 스케줄도 잘 조절했고, 낮에도 활동량 충분히 해주고 스킨십도 많이 해주었는데, 대체 왜.
20분 내로 잠들면 감사하지만, 그 이후에 다시 1시간도 안 되어서 깰 때.
깨고 나서 쉽게 입면하지 않고 말똥말똥 눈을 뜨고 놀고 싶어하는 얼굴을 볼 때.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모유도 줘야 하고, 이유식 등 여러 육아 집안일로 고된 내가 불쌍하지도 않니, 좀 봐줄 생각은 없는 거니, 돌아오지 않을 답만 묻는다.
진지하게 내 생명력을 깎아 아기에게 주는 느낌이라 최근에는 단유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다음 날 육아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하고, 모유 줄 때도 더 피로해지는 느낌이 든다.
제일 힘든 건 아무래도 아기 울음소리이다.
아이를 안고 토닥이고 눕히면 귀신 같이 알고 울어재끼는 아가는 야속하다.
아이의 몸은 따뜻하고 몽글하지만,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은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 없다.
낮 동안 화사하고 해사하게 웃던 아이는 어디로 간 걸까.
울음소리는 귀를 넘어서 점점 더 내 몸 어딘가에 깊숙이 배는 것 같다.
땀구멍에 냄새들이 스며들듯, 귀에 달라붙은 울음소리는 마음에도 스며들고, 아이를 겨우 재우고 다시 안방으로 가는 내 발걸음과 그림자에도 군데군데 묻은 느낌이다.
안방으로 와서 잠을 청해도 아가 울음의 잔향은 그대로다.
귀애서, 벽에서 심지어 머리 맡에서도 아이의 울음이 맴도는 것 같다.
울음은 어쩌면 청각이 아니라 후각이 아닐까, 울음 냄새가 밴 듯한 내 몸.
귓가에 맺힌 울음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내가 들어마신 감정이 되었고, 제대로 분출하지 못한 채 새벽을 지나는 기분이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울음을 견디는 사람이 되었다.
그 소리의 잔상을 머금고 살아가는 엄마가 되고 있다.
오죽하면 아기를 재울 때 3m이어플러그를 착용하며 마음 깊은 곳 어디선가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엄마.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어디선가 계속 진득한 우리 아가의 울음소리를 맡고 있는 듯 하다.
아침의 해사함은 저 멀리 사라지고
새벽의 공포가 남은 듯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 날 해가 뜨면 새벽의 그 아기는 사라지고 없지만,
이내 새벽이 찾아오면 다시 그 아기의 울음소리를 만날 것 같은 착잡한 기분이다.
아기를 사랑하고, 행복한 육아를 이어나가는 것과 별개로 새벽녘의 아기 울음소리는 고통스럽다.
원더윅스인지 이 앓이인지 수면퇴행인지
그럴 듯한 이유들을 생각해 내지만, 이젠 그런 거 말고 그냥 안 울고 잘 자주면 좋겠다는 원초적인 욕심만 남았다.
내가 나쁜 엄마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은 내려놓은지 오래이다.
아가 너도 힘들겠지만, 너를 사랑하는 내가 조금 더 힘낼 수 있길 너도 협조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뿐이다.
그리하여 찐한 카페모카를 잔뜩 입 안에 머금고
쌉싸름과 달콤함을 힘껏 느끼고 다시 아가를 품에 안고 부비부비한다.
너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무섭고 공포스럽지만, 그럼에도 너는 너무 사랑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