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쓰기 싫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양가적 감정이 함께 몰려온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글 쓰는 것이 나의 머릿속 해마를 자극하며 미래에 올 치매를 예방하고 혹여 올지도 모르는 작가적 삶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글짓기는 마음의 운동과 같아서 나의 마음과 행동을 자정하고 백수인 내가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두뇌 활동을 했다고 위안 삼을 수 있기에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늘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좀처럼 글을 쓰기가 싫다.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이나 종이 한 장을 꺼내 빈 평면을 메꾸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니.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쓰기 싫은 마음은 운동은 하고 싶은데, 운동을 하기 싫은 마음이랑 비슷하다. 운동하는 삶. 자신의 건강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이들은 주체적으로 보일 뿐만 하니라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외적으로도 매력적이다. 달리거나 등산을 한 후 땀을 쫙 빼고 나면 상쾌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오랜 헬스 후 납작해진 배와 울룩불룩 솟아오른 다리 근육을 마주하는 것만큼 뿌듯한 것도 없다. 운동을 하면 하고 난 직후에도 기분이 너무 좋고, 그 효과 역시 세 살배기 애들도 알고 있지만 그놈의 운동, 습관이 되기 이전의 시작이 너무 어렵다. 운동을 꾸준히 하던 나날이 지속되다가도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우울한 날, 딱 한 번 운동을 빼먹고 나면 그 후로 내 몸은 또 운동하기 싫어를 외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글 쓰는 근육이 쉬고 싶어 해서 휴식을 허락하고 나면 다시는 움직이기 싫다고 파업을 한다.
글을 쓰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를 때. 쓸 말이 없을 때.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그때를 만났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쓰기 싫다. 성실한 삶을 살고 싶은데, 해야 할 일(밥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등 주부로서 주어진 일들)만 후닥닥 해치우고, 하고 싶다 외치던 일들(그림 그리기, 글쓰기, 운동하기)은 미뤄 미뤄 두고 있다. 글도 쓰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읽는 책이라곤 추리 소설뿐이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새벽 다섯 시 반, 남편이 출근하는데도 ‘잘 다녀와.‘하며 말로만 배웅하고 그대로 누웠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낸다면, 나는 하루종일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영화를 요약해 주는 유튜브만 볼게 뻔했다. 잠깐 기지를 발휘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세팅을 해 놓았다. 의지대로만 행동한다면 또 한 번의 허성세월을 보낼 나에게 아침이면 거리 청소를 하는 길에다 차를 세워놓아 8시 이전에는 차를 빼러 밖으로 나갈 수밖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거리청소 하는 길에 계속 차를 방치해 두면, 엄청난 벌금이 떨어진다. 돈을 벌어오지는 못할 망정, 벌금으로 돈을 쓸 수는 없는 백수이기에 나는 일어나야만 했고, 차를 빼야만 했다. 그리고 차를 뺀 김에 바로 카페로 나갈 것을 예상했던 어제의 나 덕분에 오션 에비뉴에 있는 자바 커피숍에 앉아 이렇게 몇 자 적을 수 있게 되었다.
혼자 몇 번 왔더니 커피숍의 아저씨가 내 얼굴을 기억했는지 오늘 내가 엄청 좋아 보인단다. (You look great today.) 급하게 나온 탓에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에 선크림과 립글로스를 발랐는데 괜히 쑥스럽다. 미디엄 사이즈 컵에 에스프레소 1개 샷을 넣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더니, 커피를 좋아하지 않냐고 묻는다. 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커피를 마시는 사회에 오래 있다 보니 커피를 마셔야겠고, 그래서 연한 커피를 마신다는 장황한 설명을 하기 싫어 얼버무리고 있는 나에게, ‘커피 향을 좋아하는구나? 모두의 커피 취향은 다르지.’ 하며 싱긋 웃어 보이는 아저씨를 보며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내가 아이패드 하나를 가지고 카페에 앉는 것은 운동 시 본격적인 코어 근육을 단련시키기 전 러닝머신을 타듯,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나올 수 있도록 소소한 글을 쓰며 작은 구멍을 뚫는 작업이다. 주변을 관찰하며 글감을 찾았지만 아직 날카롭게 깨지 않은 나의 뇌는 어제의 나를 반추하며 내가 왜 이곳에 앉아 있는지를 주목했다. 빈 스크린을 킨 후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은 글 쓰는 일에 대해 쓰고 있다. 작가들이 흔히 쓰는 ’글쓰기, 그 시작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지 않던가. 정말 쓸 말이 없거나, 정말 스스로의 정체성에 ’작가‘가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나 생각하게 된다. 작가들의 클리셰를 따라 하기 싫은 내가 똑같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글을 쓰게 되다니. 그래도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칭찬하는 마음과 뻔하고 의미 없는 무언가를 생산해 낸다는 자조적인 평가가 머릿속에서 서로 펀치를 날리고 있는 가운데, 여러 감정이 마음속에 번진다는 건 글을 쓸 준비운동이 먹히고 있음을 실감하며 조금은 뿌듯하다.
자 이제 준비운동은 끝났다. 한 번 또 써봐야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글 쓰는 코어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힘을 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