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2024.7. 샐러드클럽 후기
지난날 나의 관심이라곤 오직 ‘인간적인 성장’ 뿐이었다. 책 읽고, 글 쓰고, 공동체를 만들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열정을 쏟았다. 남편인 영감은 빵집을 운영하며 내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우리는 각자의 일로 바빠 아이들을 볼 때만 얼굴을 마주했다. 하루 일과가 맞벌이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쭉 살아도 되었지만 나는 한 가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영감과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꿈꾸는 더 나은 사회의 그림에 그가 빠지는 것이 슬펐다. 함께 하고 싶어 제안도 여러 번 했지만 그는 한 가정의 경제적 가장이기에 언제나 일이 먼저였다. 일과 돈을 포기하라고 설득하기엔 내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일과 돈, 내가 원하는 성장, 함께 갈 수는 없을까? 너무 큰 욕심일까 생각하던 차에 스캇 펙의 <어떻게 마음을 비울 것인가>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공동체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언제나 스캇 펙의 도움을 받는다. 그가 말하길 돈을 버는 회사에서도 ‘진정한 공동체’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공동체를 빵집으로 끌고 들어왔다. 공동체적 조직문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빵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메뉴를 만들고, 디자인을 손보고, 손님을 맞이했다. 두 명이서 함께 하는 빵집은 전보다 활기가 돌았고, 손님이 조금씩 늘었다. 반년쯤 지났을 때 이제 두 사람이 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일이 많아졌다. 마침 평소에 알고 지내던 꽃다지라는 친구가 일을 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공동체를 만든 적이 있었고, 어느 힘든 날 그에게 위로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일을 구실로 그와 함께 살고 싶었다. 밤새 만든 제안서를 뽑아 들고 그를 만나러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것이 샐러드클럽의 시작이었다.
‘샐러드’라는 표현은 스캇 펙의 <어떻게 마음을 비울 것인가>에서 빌려왔다. 스캇 펙은 이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재료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녹아들어 죽 같은 ‘함께’가 아니라 다양한 맛과 질감을 맛볼 수 있는 샐러드 같은 ‘함께’여야 한다고 말이다. 부드러운 채소에 아삭한 파프리카, 고소한 치즈에 오독오독 씹히는 견과류까지. 다채로운 맛과 식감에 ‘함께’가 즐거워진다.
“일하러 나갈 곳이 있어서 좋았어요.”
꽃다지가 샐러드클럽에 함께 하겠다고 답을 주었다(야호!). 일주일에 두 번 빵집에서 꽃다지를 만났다. 누군가를 꾸준히 만나는 것은 어쩌다 커피 한 잔 하는 것과 달랐다. 오랜만에 만나면 그간의 일 중 기억에 남는 큰 사건을 위주로 이야기하는 반면,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게 되니 이런저런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 캠핑 간 이야기, 어제저녁 아이에게 열이 났던 일, 어제와 다른 오늘의 기분 같은 일상을 공유했다. 그것이 나에게 소소한 행복이 되었다. 그와 만나길 기다린다. 그를 궁금해한다. 일터가, 빵집이 환대의 공간이 된다.
“일하러 나갈 곳이 있어서 좋았어요.” 꽃다지가 말했다. 그의 말에서 나는 일터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모진 풍랑 속에서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닻과 같은 것이었다. 살아있다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좋다 나쁘다 따로 없다지만 새로운 사건은 나를 휘청이게 만든다. 흔들리지만 휩쓸리고 싶지는 않다면, 일이 도움이 된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하는 것으로 나를 지금에 뿌리박고 있게 한다.
구성원을 생각하는 마음
“왜 돈을 벌고 싶어요?” 내가 꽃다지에게 물었다.
“남편에게 일하지 않는 시간을 주고 싶어요.” 그가 답했다.
4인 가족의 구성원인 그는 경제적 가장의 의무를 남편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가 돈을 벌면 남편이 마지못해 나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좀 더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대한민국 가장의 이야기를 하면 나는 빵집의 제빵사이자 남편인 영감이 생각난다. 영감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늘 바쁘셔서 아들인 자신과 시간을 보낸 기억이 거의 없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그런 아버지와 다르면서도 또 닮았다. 빵 굽는 일을 열 두 시간씩 하고도 문제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웃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일을 사랑한다. 그의 성실함 덕분에 빵집이 지금까지 문을 열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충분히 쉬고 있는지 궁금하다. 일이 너무 고된 데다 ‘가장의 책임’ 같은 것에 붙잡히면 쉬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죄짓는 기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할 일을 아무것도 주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 적이 있는가. 방학을 맞은 아들이 빵집에 따라와 심심하다고 칭얼댔다. 놀아달라며 나를 조르다가, 의자에 멀뚱히 앉아 지루해하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하며 슬쩍 쳐다보면 저 혼자 사부작대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한참 뒤에 “엄마” 부르며 나타나서는 내 앞에 거대한 선풍기(전동드릴에 모형 비행기 날개를 끼운)를 들이밀었다. 버튼을 누르자 프로펠러가 돌고 아이는 “시원하지?” 하며 활짝 웃었다. 그런 기쁨에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금 어때?”
샐러드클럽 게시판(멤버들이 공유하는 글쓰기의 장)에 꽃다지가 글을 남겼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으로 느껴졌다면 이제는 고마움이 더 커진 것 같다.”
내가 많이도 물었다. “지금 어때요?” 나는 그가 궁금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번 물어보지 않고서 그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어제는 그랬지만 오늘은 또 어떤지, 매 순간의 그를 알고 싶었다.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좀 더 유연하게 해보고 싶다.
꽃다지가 집안일로 걱정이 많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았다. 그가 삶의 힘든 시간을 헤쳐 나가는 동안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지금 어때?’ 하는 물음을 가지고. 방법은 간단하다. 상대의 말을 듣고 그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이때 내게 있는 선입견과 판단을 내려놓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만 온전히 상대를 알 수 있다. 말은 쉬우나 직접 해보면 꽤나 까다롭다. 나는 서툴러 매번 애를 먹는다. ‘지금 어때?’라는 질문은 존재를 ‘알아가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연습을 하려고 샐러드클럽을 만들었다. 그래서 고마운 쪽은 오히려 나였다.
샐러드클럽의 제안서를 꽃다지에게 건넬 때 나는 힘주어 말했다. “불편한 상황은 틀림없이 일어나니 그것을 마주하려는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그건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 넣는 기합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적인 성장은 두려움과 그걸 넘어서는 나를 기대하는 것의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