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식당에서 배운 '사람을 위한 밥'
일본의 한 공동체로 탐방을 간 적이 있다. 작은 도시에 주거지와 농장과 일터가 모여 있고 삼삼오오 모여서 그날의 일을 하다가 밥 먹을 시간이 되면 한가운데 커뮤니티 센터라는 곳으로 모였다. 커뮤니티 센터에는 세미나실과 카페 그리고 식당이 있었다. 공동체 일원이라면 누구든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돈은 내지 않았다. 이곳에는 돈으로 ‘거래’가 일어나지 않았다. 밥을 먹으러 온 이는 공동체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짓는 밥은 그가 올해 농사지은 쌀로 만든 것이다. 밥을 내어주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공동체를 위해, 서로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야를 좁혀 보면 마치 농부 가족 같지만 이곳의 규모는 훨씬 컸다. 매 끼니 100인분의 밥을 준비한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누구든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국적이 다르든, 나이가 많든 적든, 통용되는 일본어만 쓸 수 있다면 누구든지 배우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일본어는 못 하지만 그곳의 일원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살 집이 없어서, 일할 곳이 없어서, 돈을 못 벌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나를 존중해 준다. 그리고 누군가 해주는 밥을 먹을 수 있다. 상상만으로 행복해졌다.
두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 한 가지를 뽑으라면 바로 ‘밥’이다. 하루종일 일하고 나면 체력은 바닥인데 그럼에도 힘내서 아이들 먹을 밥을 지어야 하는 게 부모가 된 나의 의무였다. 나는 엄마가 반찬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는 사람이 부럽고, 어릴 때는 맛없다며 투정 부렸던 학교 급식을 종종 그리워한다. 그 정도로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탐방하는 동안 공동체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밥을 준비해 준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매 끼니 그렇게 밥을 먹었다. 공동체원들이 근처 논과 밭에서 재배한 농산물로 따뜻한 밥과 반찬이 가득 들은 도시락을 만들어 주었다. 맛 또한 훌륭했다.
하루는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분이 식탁을 돌며 자그마한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녹차였다. 나는 그 녹차를 아끼고 또 아껴가며 마셨다. 잔을 비우면 이 특별한 식사도 끝나버리기에 옆 사람과의 대화도 잠시 멈추고 녹차에 집중했다. 입 안에 한 모금 머금었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감사함과 경이로움을 그 한 모금에 진하게 우려내었다. 그리고 꿀꺽 삼키자 돌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먹은 밥은 나를 위한 밥, 사람을 위한 밥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당장 현실의 한복판에 내동댕이 쳐졌다. 내겐 공동체도, 밥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이들은 당장 오늘 저녁이 뭐냐고 내게 물었고 밥과 국과 반찬을 만들고, 아이들을 씻기고, 뛰어놀고, 책 읽어주고, 속상한 일 들어주고, 그 와중에 일도 하고 체력관리로 운동도… 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으레 밥을 포기했다. 집 앞에 잔치국수, 비빔밥, 돈까스집에 가면 됐다. 한 번 먹을 때마다 쌀 8kg(넉넉 잡아도 우리 식구 22끼 먹을 양) 살 돈이 나갔고, 어디서 온 어떤 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나를 불안하게 했고 어떤 재료를 쓰는지 짐작된다는 점은 나를 죄책감에 짓눌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유난히 감기에 자주 걸리면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아이들 밥까지 섬세하게 챙기기는 어려웠다. 밥을 포기할 수도, 일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일본으로 갈 수도 없었고, 내가 사는 곳에 하루아침에 공동체를 만들 수도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밥시간만 되면 날카로워지는 나를 위해 남편이 두 팔 걷고 나섰지만 내 몫의 일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밥과 일, 둘을 하나로 합쳐보기로 했다.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게 ‘밥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먹기 위해 밥을 한다. 그 밥을 많이 한다. 이웃들과 나눈다(판매). 그러자 결국 탐방에서 경험했던 공동체 식당을 하게 된 셈이다(자본주의 버전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준 밥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때의 나처럼,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도 그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선 내가 안심하고 속 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 땅에서 난 우리밀로 소박한 빵을 만들고, 거기에 제철에 나는, 얼굴을 아는 농부가 키운 농산물로 맛과 영양을 풍성하게 해주는 채소 반찬을 곁들여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자 밥을 먹는 일이 편안해졌다. 우선 마음에 불안과 죄책감이 없어졌다. 매 끼니 먹어도 안심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채소 반찬보다 국수나 돈까스가 더 좋은 모양이었지만 일단 한번 맛을 보면 의외로 맛있다며 놀라곤 했다. 채소 반찬은 밥이랑도 썩 잘 어울려 팔고 남은 반찬을 밥과 함께 저녁상에 올리면 반찬가짓수만 금세 네다섯 개가 훌쩍 넘어 진수성찬이 되었다. 너무 과한가 싶어 멋쩍게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든든했다.
다음은 나눌 차례이다. 공동체 식당의 풍경을 떠올린다. 보채는 아이를 겨우 재운 부모도, 출근해 복잡한 계산을 마친 회사원도, 밭에서 고구마를 수확하느라 땀과 흙투성이가 된 농부도, 식사 시간이 되면 누구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밥이 사람을 기다린다. 밥을 먹고 난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을 잘 보낼 수 있게 도와주려고 말이다. 그런 기특한 밥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