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걷는 세상 7
나는 우리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큰 아들 벼리는 어린 시절 유달리 책 읽는 것을 좋아라 했었다. 어린 시절에는 글자가 많이 없는 동화책을 즐겨 읽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제법 글이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림이 줄어들고 글자가 많아지는 책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때에 아이들이 책에 대한 부담을 가지게 된다면 아마도 책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평생 가지고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벼리가 글자에 대한 부담을 이기고 글자가 아니라 책의 내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책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나는 추리소설을 떠올렸다. 나도 어린 시절 추리소설을 읽으며 탐정의 신비에 가까운 추리력에 푹 빠져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한국에 들어가 있던 기회를 이용해 아이를 데리고 부산에서 제법 크다고 소문난 교보문고라는 대형 서점을 갔다. 우리는 바로 추리소설 코너로 들어가 적당한 책을 함께 찾아보았다. 그때 추리소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단편집이 눈에 띄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판형의 책으로 열몇 개의 단편을 모아 놓은 책이었다. 물론 그림은 거의 없었지만 글자의 간격과 줄 간격이 그나마 넓은 것이 벼리가 읽기에 적당할 것 같아 망설임 없이 그 책을 선택했다.
책을 사고 서점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셜록 홈스의 활약상을 신나게 이야기해주며 책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켜 주려 했다. 사실, 그림도 없고, 두께도 웬만큼 두꺼운 이 책을 벼리가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벼리는 그 책을 단번에 다 읽었고, 글자가 많은 책에 대한 관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하게 되었다.
그 뒤로 벼리는 자기의 용돈을 모아 직접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사 오곤 했었다. 한 번은 집에 가보니 메트로 2033이라는 제법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으로도 나온 제법 알려진 소설이었다.
핵전쟁이 일어난 후, 모스크바의 지하철을 배경으로 삼은 SF소설이었는데, 지하철이 배경이 되다 보니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였다.
벼리는 그 책을 읽고 난 뒤 가보지도 않은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을 줄줄 꿰고 있었다.
"나중에 러시아에 가면 베데엔하 역에 꼭 가볼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지하철 역을 따라 여행을 하고 싶어요. 책 속에 나와있던 모든 역을 하나하나 다 찾아보면서 말이죠."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벼리의 한 마디였다.
아마도 벼리의 머릿속에는 나름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 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그 책을 내가 읽어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벼리가 이야기 했던 베데엔하 역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나도 그것을 읽었고, 우리는 핵전쟁과 러시아, 그리고 지하철 역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로, 벼리는 정기적으로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입했고, 나는 벼리가 구입한 책을 함께 읽고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아이들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가능하면 피하는 질문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난 감상은 어때?", "그 책을 읽고 넌 뭘 배웠니?" 등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특히 부모나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물어본다면, 그 순간, 아마도 그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졌던 영화 같은 장면 장면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책을 읽을 때는 그랬었다.
대신, "우와, 오늘 아르티옴이 마시던 것처럼 커피나 한잔 할까?", "아! 메트로 2033의 아르티움? 그럼 제가 방독면 쓰고 나가서 커피콩을 막 구해 올까요?"
뭐. 이런 식이다.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주인공의 옷차림, 액세서리, 뭐 그런 것들에 대해 잡담처럼 늘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데 커피는 무슨 맛이에요?"라고 소설의 이야기에서 커피의 질문이 이어지고, 커피의 이야기가 다른 나라에 있는 커피 문화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나갔다.
벼리는 점점 스스로 자기가 책을 읽는 분야를 선택해 나갔다. 내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고 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고르고, 자기 나름의 선택 기준을 하나씩 만들어 갔다.
어느덧 벼리의 책장에는 자기만의 책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고, 벼리는 그 책들의 책날개나 겉표지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는 벼리가 읽는 책은 가능하면 다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아이가 지금 읽는 책이 무엇이고, 요즘 어떤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부모의 기준으로 볼 때, 아이들이 읽기에 부적절한 내용의 책도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내 본 적이 없다.
단지, 그런 책을 읽고 나서,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책이......, 별로 재미는 없네. 다른 사람에게는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네."
이것은 벼리의 취향에 대해 지적질을 하기보다는 책을 읽는 취향이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물론 내 아이가 읽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바라는 그런 취향의 책이 아니라는 말을 돌려서 하려는 목적도 있기는 했다.
일본의 책이나, 영화등 그들의 문화가 대부분 금지되던 우리 때와는 달리, 벼리가 책을 읽고 문화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일본 서적이 대거 번역이 되어 나왔다.
큰 아들 벼리가 중학생이 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책들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세대차인인지, 아니면 국수주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문화적 보수주의였던 나는 일본의 그런 이질적인 문화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북한과 일본은 무조건 싫어해야만 하는 시대적 공감대를 지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벼리가 읽고 있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야 하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벼리가 사놓은 일본 서적을 읽게 되었고, 나도 점차 그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정에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히가시노 게이코와 미카미 엔이었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이라는 미카미 엔의 책은 그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서점에서 구입을 했고, 한국어로 번역본이 늦게 나오자, 벼리는 급기야 일본어 원서를 사서 읽기도 했다.(일본어 사전을 뒤져가면서)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은 고서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술술 읽히는 반면 히가시노 게이코의 추리 소설은 인내력을 길러주는 좋은 책이었다.
추리소설의 특성상, 책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건의 발생, 그리고 탐정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인데, 추리소설의 핵심인 반전은 언제나 지루한 앞부분의 이야기가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참을성 있게 주인공과 함께 증거를 찾으며 나름 범인을 지목하기도 하는 가운데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정신이 멍해지며 전해오는 반전의 짜릿함에 아이들은 재미가 없어도 마지막에 찾아올 희열을 위해서 진득한 인내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나중의 이야기이지만, 메트로 2033을 읽으며 모스크바 여행을 꿈꿨던 벼리는 생애 첫 배낭여행을 모스크바 대신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여행 콘셉트와 장소는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한 소설에 나오는 니혼바시였다.
여행 가이드나 블로그에 나온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대신, 소설의 주인공인 가가 형사의 발자취를 따라 그 배경이 되었던 붕어빵 가게와, 기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도로변 그리고 센베이 가게를 돌아다녔다. 물론 일본 서점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원서로 된 책을 찾아보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던 우리 아이들이 상하이로 와서는 문제가 생겼다. 한글로 된 책을 구하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읽을 책을 손에 한가득 사 가지고 들어오지만 열흘이면 모두 다 읽어 버렸다.
마침 아내가 한인촌이 있는 곳에서 한국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곳을 알아내어 누리와 벼리는 매주 십여 권의 책을 빌려와 읽었다. 하지만, 즐겨 읽던 추리소설의 신간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나는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상하이의 중심 지역이며 외국인이 가득한 지역이었지만, 아이들이 함께 뛰어 놀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느끼는 다양성보다는 따분함이 더 강한 지역이었다.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집 바로 근처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곳에서 추리소설처럼 재미난 일이 생겨난다면 아이들도 얼마나 좋아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그냥 우리가 사는 주변에서, 평소에 자주 보던 사람들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직접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직업적 장점을 발휘해 전직 의사인 주인공을 두고, 의학적 트릭이 있는 사건을 만들어 내었다. 그 사건에 연루되고 발생하는 지역은 전부 아이들이 알고 있는 사람과 주변의 장소를 사용하여 간단한 추리 소설을 써보았다.
아이들은 옆집 외국인이 나오고, 자주 가는 카페가 등장하는 소설을 보고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팔자에도 없는 어설픈 작가가 되어 나의 추리 소설의 구조와 짜임새를 아이들과 의논을 하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분석을 부탁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마치 자신이 평론가가 된 것처럼 나의 소설을 평가하기도 하고, 부족한 점과 보완할 점을 지적해 주었다.
급기야 아이들은 제각각 나름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블로그 같은 것을 이용해 글을 쓰고 있었지만, 어떤 서사적인 구조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해외에서 조기유학을 하는 아이들에게 생길 수 있는 모국어의 결핍과 문장력의 약화를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을 보고 책을 읽는 독자에서 글을 창조해내는 작가의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장력과 필력이 뛰어난 작가가 될 필요는 없었다. 독자는 우리 가족이며 평론은 서로 서로가 해주니까.
단지, 글을 쓴다는 것이 전문적인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만 깨닫게 되어도 큰 수확이라는 나름의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읽을 책이 부족해서 소설을 적게 되었고, 내가 글을 적고 있으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글 쓰는 것에 가까이 다가왔다.
브런치에 이 글들을 올리면, 작은 아들 누리는 바로바로 확인을 하고 읽어 본다.
그리고는 자신의 관점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자신의 브런치 계정에 따로 글로 적고 있었다.
나는 내 관점에서 아이들이 이렇게 변화해 왔다고 느꼈지만, 누리가 적은 글을 보고는 나의 착각이었구나 하는 글도 있었다.
동일한 시간을 거쳐 온 내가 쓰는 다른 관점의 글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은 아들 누리의 글이 이곳 브런치에 올라와, 내 주관적인 시선에서 본 기억들을 다채롭게 해 주길 기대한다.
(안타깝게도, 누리가 브런치에 보관하고 있는 글들은 매번 작가 신청에서 떨어져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인지 모르겠지만, 줄기차게 신청을 해도 '다음기회를 이용해주세요.'라는 안타까운 메시지만 날아온다. 그래서 나도 아직 누리가 쓴 글을 다 읽어 보지는 못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 누리는 자신의 필력이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일기를 쓰고, 좋은 표현법을 배우기 위해 좋은 글들을 보며 글쓰는 공부를 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자기의 종교도 아닌 성경을 처음부터 하나 하나 필사하고 있을까. 이제는 그냥 다른 플랫폼에 자신의 글을 올릴까도 생각중인것 같았다.
담당자님, 부탁 드릴께요. 누리가 쓴 글을 보고싶네요.)
- 8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