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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Dec 05. 2023

서른두번째 길. 물질들의 이야기

법칙은 어떻게 시간 속에서 그와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법칙은 시간 속에서 항상 같지는 않았음이 드러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역사적이고 진화론적 물음이 존재한다.
- 리처드 파인만 -*



지난번 길에서 양자 얽힘을 지금까지 구상해온 여러 개념들을 활용하여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개념은 아직 활용하지 못했다. 물질적인 일들에서는 추상적인 성격을 지닌 이야기가 작동한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양자들의 얽힘 현상은 지연된 일이지만 그동안 말한 기준에 따른다면 이야기는 아니다. 양자 얽힘이라는 일에 생략된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일의 진행에는 A에서 출발하여 A가 아닌 것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시도하지만, 그것은 일이 가진 이야기적인 성격이지 일과 분리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잠재된 습관이나 기억처럼 내용의 일부가 생략되어 다시 실행되려면 그에 맞는 조건이 필요한 일을 이야기라고 불렀다.   


모든 일은 이야기를 남길 수 있고 물질적인 일들도 그렇다. 단, 남겨진 이야기가 어떻게 다시 쓰이느냐에 따라 그 작용이 두드러져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생명체의 활동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생명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쓰이기 위해서도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게 된다. 

특히 인간처럼 각자의 개성의 차이가 더 큰 생명체에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더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세포분열이 곧 번식인 단세포 생물들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수집과 조합이 특수한 생명체를 만들고 생명체의 활동이 다시 특수한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생명체와 달리 물질들의 이야기는 매우 보편적으로 만들어지고 작동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소립자들은 개개의 개체로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A와 B라는 두 전자가 모였다가 떨어질 때 서로 완전히 같기 때문에 어느 것이 A이고 B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원래 개별적인 일보다 보편적이다. 습관이 생겼다는 것은 여러 일을 통해 생긴 이야기들에 내용상의 공통점이 있어서 서로 겹쳐졌다는 것이고, 그 작동도 여러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하게 쓰이게 되기 때문이다.

물질들의 이야기는 공통된 내용의 일들이 전 우주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이야기의 보편성도 생명체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보편적으로 만들어지고 보편적으로 쓰일 수 있다.


이 보편적인 물질들의 이야기를 통해 규칙적인 성격이 강한 물질들의 법칙을 일과 이야기의 관계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법칙을 구성하는 내용들과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내용은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내용들 사이의 관계도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현악기에서 줄의 길이와 공기의 진동 그리고 소리의 높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고, 동서양의 현악기들은 모두 이 관계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아마도 다른 우주에서도 이 내용들의 변하지 않는 성질이 똑같이 중요하게 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내용이 나타나고 어떤 내용들이 서로 짝을 이룰 것인가의 문제는 내용들의 변하지 않는 측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일의 진행 법칙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을 숙달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물질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칙의 측면과 우리 우주의 물질 공동체의 관습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게 된다. 

이 관습화된 이야기의 작동을 통해 물질들 사이의 일들에 더 숙련된 일관성을 부여하고, 우리 우주라는 넓은 모임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화될 것이다.  



파인만은 어느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 어떤 진화론적 물음도 허용하지 않는 영역이 물리학이다. 그런데 우리가 물리학의 법칙을 알고 있긴 하지만 … 이 법칙은 어떻게 시간 속에서 그와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 따라서 법칙은 시간 속에서 항상 같지는 않았음이 드러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역사적이고 진화론적 물음이 존재한다." ...

법칙들은 우주 밖에서 우주에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외부적인 존재도, 그것이 신적인 것이든 수학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사전에 자연법칙이 어떠할 것이라고 구체화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자연의 법칙들은 시간 밖에서 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연법칙들은 우주 내부에서 출현하며, 이 법칙들이 서술하는 우주와 함께 시간 속에서 진화한다. 게다가 생물학에서처럼, 우주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면 이 현상 속의 규칙성으로서 새로운 물리법칙이 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리 스몰린, 강형구 옮김,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31~32쪽, 김영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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