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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Feb 15. 2024

서른여덟번째 길. 뒤바뀐 자리

생명의 속성은 모두 정보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 최무영 -*



각각의 일들은 펼쳐진 이야기(서른세번째 길 참조)라는 활동하는 법칙에 둘러싸여 일어난다. 펼쳐진 이야기는 적어도 우리 우주 안에서는 사적인 자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편파적이지 않은 자리에서 편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한다.

생명에서 일과 이야기의 이러한 자리 관계는 뒤바뀐다. 생명체는 구체적인 일들에 둘러싸여 있다. 생명 사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에 따라 일한다. 그래서 생명의 이야기는 보편성이 제약되고 다양하게 변형된다.


생명은 이야기를 훔친다. 생명체는 구체적인 일들에 몸이라는 경계를 만들어 훔쳐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고 함께 일하게 한다. 그러나 생명은 이야기를 단지 훔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생명체는 각자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이야기는 몸 밖의 일들과 확연하게 달라진다. 밖에서는 우연히 어쩌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안에서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 된다. 일은 개체의 생존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이야기로 조합된다.


생명은 가치를 훔친다. 결과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서  다양한 시도로 나아가는 일의 보편적 경향성은 개체화된 이야기와 결합하면서, 생명이라는 특별한 상태지키려는 본능 위에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이야기로 변형된. 보편적인 경향이 사적인 관점을 통과해서 욕구와 의지가 된 것이다.

생명의 일은 관습적인 진행 과정에 따라 일어나거나 우연히 마주치는 것만이 아니라, 각각의 개체가 지닌 다양한 이야기 묶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물질적인 일들은 우연한 조건에서 마주치며 일어난다. 펼쳐진 이야기는 이 조건에 맞는 관습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 생명의 이야기는 우연한 조건에 준비된 조건으로 대응함으로써 원하는 일이 일어나게 한다. 우연과 관습에 개체적 습관을 더해서 살아남는다.


생명은 시공간을 훔친다. 물리적인 시공간은 단편적인 일들이 순차적으로 확실한 매듭을 지어가며 촘촘히 짜여진다. 생명체는 그 촘촘한 바탕 위에 거미처럼 자신만의 그물망을 펼쳐 놓고 자리를 잡는다.

과거는 흘러가지만 그물에 이야기라는 흔적을 남기고, 미래는 오지 않았지만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에 겹쳐지며 방향을 안내한다. 그물이 흔들리는 진동은 주변 상황을 알리는 정보가 되고 거미는 그에 맞는 습관을 일으킨다.   


생명에게 원죄가 있다면 환경을 사적으로 훔쳐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속죄의 길이 있다면 훔쳐낸 것들에 가치를 더해 삶이라는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다. 




생명의 속성은 모두 정보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적절한 구조로 잘 짜여 있다는 말은 많은 양의 정보를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이 구조를 가지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짜임새 있는 집을 짓기 위해서 정보를 충분히 담은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 법과 마찬가지이지요. 대사 작용은 생명체가 외부로부터 자유에너지, 곧 에너지와 정보를 받아들여 이용하는 과정인데, 여기서 에너지보다 정보가 중요합니다.('에너지보존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소모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결국 대사란 정보의 흐름을 통해서 자신의 정보를 늘리는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한편 응답은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정보교류를 통해 이루어지며, 번식은 세대 사이에서 정보의 전달입니다. 이른바 유전정보를 물려주는 과정이지요. 마지막으로 진화는 긴 시간 눈금에서 환경과 정보교류에 의해 일어납니다. 따라서 생명현상의 본질은 정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흐트러지지 않고, 엔트로피도 늘어나지 않고 어떻게 적절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는 커다란 의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을 답으로 제시하지요. 엔트로피가 늘어나지 않고 낮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환경으로부터 에너지와 정보, 곧 자유에너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최무영,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666~667쪽, 책갈피, 2019.

**같은 책 6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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