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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Apr 22. 2024

마흔다섯번째 길. 현상과 의식

움직임 속의 짧은 머무름
그것이 삶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 <여름의 묘약> 중에서 -*



감각 정보들을 통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 세계는 수없이 다양할 수 있다. 실제로 다양한 동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감각 정보를 재구성하고 있고, 한 사람도 그때마다 재구성한 결과가 조금씩 다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감각은 외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하는 생존의 맥락 속에 있다. 즉각적인 인식과 반응을 위해서는 뚜렷한 내용들로 종합되면서 현상이라는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희미한 이야기들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현상은 외부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시도들 속에서 선택한 일의 결과다. 그래서 이야기로서의 성격과 뚜렷한 일의 결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보여주지만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현상'이라고 이름 붙일만 하다.

현상을 이루고 있는 감각 내용들은 뚜렷한 특징을 가지면서 다른 내용들과 공동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수많은 외부 정보들의 종합은 현상이라는 결과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현상의 뚜렷한 결과는 그 자체로 다음 일을 일으킬 수 있는 확고한 바탕이 된다.

  

현상은 정지된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재구성되는 결과들로 흘러간다. 이전 결과에서 다음 결과로의 진행은 다시 이야기를 만든다. 한 시점에서 현상의 내용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신해서 나타나고, 현상의 진행은 다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뚜렷한 현상의 연속을 통해서 감각 내용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모이게 된다. 세포에서 물리적인 일들의 이야기가 계속 쌓이면서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에서는 감각 내용으로 변환된 이야기들이 계속 쌓이면서 쓰이게 된다.

  

이야기는 관련된 일들을 따라다니며 다음 일을 시도한다. 따라서 세포에서 이야기들을 저장하는 장소가 따로 있지 않듯이, 뇌에서도 이야기들을 따로 저장하는 영역이 따로 있어서 현상의 이야기들이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뇌에는 세포와는 다른 내용의 이야기들이 모이는 것이지 이야기를 독점하고 있는 기관인 것은 아니다.  

단, 남겨진 이야기를 세포에서처럼 뭉뚱그려 쓰지 않기 위해 뇌는 이야기와 관련된 일들을 분산시키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이야기의 진행에 대한 일반적인 유형화, 이야기의 세세한 내용이 남아 있는 사례 기억, 겹쳐져서 행동하는 습관과 숙련됨, 언어로 연결시키고 일반화하는 개념들, 감정이라는 강한 평가를 덧붙인 충동 등 다양한 이야기 가공 방식이 있다.


남겨진 이야기들이 다시 쓰이는 데에도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그 사용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일로써 다음 진행을 시도하고 있다. 잊혀진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연관된 상황이라는 조건이 갖춰지면 자동적으로 그 일과 이야기에 포함되면서 쓰이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지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진행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미리 결정하는 일에 연관된 이야기들이 자동으로 끼어든다.

이렇게 현재 상황에 대한 뚜렷한 현상을 만들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같이 활용해서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식하는 일에서는 상황과 반응, 현상과 이야기, 에너지와 정보, 예상과 실제의 뒤엉킨 리듬이 맞아 돌아가는 순간을 다시 현상 속에서 뚜렷하게 경험하면서 초점을 조절한다. 




길고 긴 여로의 끝, 마침내 도착한 집.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서늘한 물로 손과 얼굴을 식힌다.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덧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오! 목을 쓰다듬는 바람의 가벼움이여, 날아갈 것 같은 홀가분함이여! 나는 여행에서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수단으로서의 긴 여행은 끝났다. 이제 설레는 기대와 즐거움의 시간만이 망망대해처럼 앞에 펼쳐진다. 움직임은 수단이고 머무름이 비로소 삶인 것인가? 아니, 움직임 속의 짧은 머무름, 그것이 삶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오른발이 아직 뒤에 있을 때 그 중심에 머무는 몸의 짧은 순간, 전신의 모공을 열어 빨아들이는 세상의 빛과 냄새와 소리와 촉감, 그것이 여행이다.*


* 김화영, <여름의 묘약> 164~165쪽, 문학동네, 2013.

**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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