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폭발 시대의 브랜딩
사유하는 소비자에게,
오늘의 글을 요약합니다.
1. 현대인은 종교에서 벗어났다고 믿지만, 브랜드를 통해 여전히 종교적 본성을 드러내며 '자아'를 숭배하고 있다.
2. 브랜드는 자아를 강화하는 성물로 작용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3. 과학과 투명성의 시대에도 인간은 신비로움을 갈망하며, 결국 다시 '종교적 인간'으로 회귀한다.—이번에는 브랜드라는 신비와 함께.
신학을 전공하고, 그 사이 시간의 경계선들을 지나, 브랜드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안에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있나봅니다. 브랜드 세계를 종교의 시각에서 자꾸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루마니아의 세계적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아데의 어깨에 앉아 이 시대의 브랜드 다이나믹스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은 자아와 브랜드의 관계를 서술하려 합니다. 이 주제는 저의 사상 기저에 흐르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비행기로 다른 도시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수속을 밟기 위해 항공사 창구 앞에 섰을 때 "당신이 최고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지와 포스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으려 서 있을 때는 자동차 회사의 포스터가 시야로 들어왔다. "당신에게 걸맞는 최고의 차를 선사합니다"였다. 공항 근처 고속도로 옆으로 보이는 패스트푸드 전문점 또한 마찬가지로, "당신이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자아 이론이 '버거킹의 성격 이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신이 된 심리학> p.167 폴 비츠
이 시대의 많은 메세지는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신이 될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애플 제품을 쓰면 내가 창조자(Creator)가 된 것과 같은 기분을 주고, 나이키는 내가 위대한 성취자(Achiever)라고 소리치며, 롤스로이스는 나에게 최고의 권력자(Leader)가 될 수 있음을 속삭이죠.
‘나’ 중심의 이러한 메세지들은 자아 폭발을 더욱 가속화합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 자아 폭발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들입니다. 브랜드는 자아를 숭배하게 하는데 까지 쉽게 나아가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브랜드는 '자아'라는 교주의 성물이 되어가고 있죠.
이야기가 조금은 극단적으로 들리시나요?
근대 사회 이후 인간은 종교성을 감추려고 애써오고 있습니다. 비이성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죠. 종교적인 것들은 과학적인 것에 대비 되며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상에 대해 루마니아의 종교사학자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역군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을 향한 모든 호소를 거절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인간 조건의 바깥에 있는 인류를 위한 어떤 모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그 자신을 완전하게 만든다. 거룩한 것은 그의 자유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오로지 그가 전적으로 비신화화될 때에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을 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성과속: 종교의 본질> p. 180)
엘리아데의 말 처럼, 근대 이후 인간은 초월을 향한 호소를 거절하고 자신에 집중합니다.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든다”는 현대 사회를 꿰뚫는 명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1900년대 초반에 이러한 글을 썼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은 여전히 우리를 전율케 하죠.
한편 엘리야데는 해당 문장을 통해 종교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에 대해 역설하려고 했지만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인간은 여전히 종교성에 기댑니다. 대상이 다를 뿐이죠. 인간이 신을 멀리하고 나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신이 되게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내가 창조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세계를 나의 의미 체계로 ‘창건해간다’는 의미이죠. 반면 일반적인 종교는 해당 종교의 의미 체계를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종교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몸부림은 결국 나를 숭배하는 종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상업적 브랜드에 대한 애정은 우리에게 여전히 종교적 인간임을 증명합니다. ‘나’라는 신이 더욱 강해지도록 돕는 도구로서 브랜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브랜드는 비종교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갖는 종교적 조각들입니다.
(이에 대한 예시가 궁금하시다면 이전 글을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현대인들이 여전히 종교성을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종교가 갖는 또 다른 특성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마력인 ‘신비로움(Mystery)’입니다. 종교는 커튼 뒤에 무엇인가를 항상 감추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커튼을 걷히고,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밝히려고 애써 왔습니다. 종교라는 커튼 뒤에 무엇이 있는지 파헤쳤습니다. 과학을 통해 미신을 규명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그러한 것의 일환이었죠. 곳곳에서 종교와 인간의 종교성을 발가벗기려는 시도는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투명해진 인간은 다시 신비로움을 입고싶어 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옷을 입는 것에 있기 때문이죠.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결국 다시 그 커튼 뒤를 갈망합니다. 투명한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끼죠. 감춰진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이 되어가죠. 다만 ‘자아’라는 신을 곁들인. 이러한 현대 인간은 끊임 없이 브랜드라는 성물을 찾아 헤맵니다.
첨언할 것은 근대를 지나 지금의 현대에서까지 종교적 인간이 발가벗겨지고 투명해졌다라는 것은 사실 착각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적 인간은 여전히 투명해지지 않았죠. 여전히 전 세계의 현대인 중 약 84%는 종교를 믿는다는 사실에서도 그 시도는 온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어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말에 동조되어 커튼을 막 휘둘러도 그 뒤의 공간은 인간에게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존재하는 것이죠. 검어요.
엘리아데의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일련의 부정과 거부에 의하여 그 자신을 형성하지만, 그가 거부하고 부정한 실재들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닌다.”(<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