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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Apr 15. 2024

댓글창은 토론의 장이 아니다

댓글 논쟁은 자위

논쟁은 언제나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진리란 고독 속에서만 익어간다.
그리고 진리가 성숙했을 때는
논쟁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수록
나쁜 것을 이야기할 위험성도 커진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


완성되어 타인에게 관찰되어진 창작물의 의미


말이고 글이고 음악이고 미술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자기표현이 공기 중으로 나가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에게 관찰되기 직전, 즉 그 찰나를  넘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브런치에서 ‘발행’ 버튼이 눌리고 누군가 내 글을 보는 순간, 내 음악이 음원사이트에서 누군가에게 공개되고, 나의 작품이 전시장에서 누군가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관찰자에게 해석되어지는 대상이 되고, 그 해석은 원작자의 의도와 일치하거나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치하는 부분보다 훨씬 많은 부분이 축소되고 확대되며 왜곡되고 과장된다. 100%의 확률로 그렇다.


심지어 창작자 스스로 조차 자신의 창작물이 공개된 후 다시 해석되거나 후회가 되는 부분, 놓쳤던 부분등이 보일 것이고, ‘때로는 이런 걸 내가 어떻게 했지?’ 라며 내가 한 일 같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1년 후 3년 후 10년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의 자신의 심리적 변화와 사회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뀐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


https://www.pinterest.de/pin/319192692377266505/

여기 노란색으로 가득 찬 종이가 있다. 그리고 100명의 관찰자는 각자는 자신이 보는 ‘그 색(the color)’를 ‘노란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설명해야 한다. 그 100명의 설명이 같은 확률은 얼마나 될까? 타인의 설명을 듣고 그 사람이 본 ‘그 색’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렇기에 창작자는 모든 관찰자의 다른 해석에 대한 설명을 할 수도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 아니 그 설명은 오히려 서로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꼬집어 ‘난 생각이 다르다!‘라는 관객에게 그 장면의 의도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창작자나 감상자 서로에게 말이다.


소통의 조건


흔히 자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나의 삶에 관심이 있거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아니면서 그런 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데없이 나의 한 조각만 보고 조언이나 충고랍시고 말을 툭하고 던지는 사람들, 그들은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상대방의 말이 없으면 자기 것이 없는 사람들. 그러나 때에 따라 진심 어린 충고도 조언도 있다.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이 그렇지 못한 사람. 걱정하는 척 하지만 그 리스크를 줄일 방법은 찾지 않고 안된다고만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할 말이 있는 사람은 게으르게 툭하고 말만 던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작품에 ‘아… 왜 저렇게 생각하지?’라고 생각이 들면 그 다른 자기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현명한 소통이다. 주변에 내가 이해할 수 없게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넌 옷이 그게 뭐냐?!‘라고 쉽게 말을 던지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는 옷이 대한 철학대로 내가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것’이 가장 진심이고 무게감 있으며 책임감 있는 방식의 ’넌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댓글 논쟁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자랑하고 남의 말꼬리를 잡으며 내가 더 논리적이라는 것을 뽐내는 것 이상이기 힘들다. 어디 원문 링크와 통계를 들고 와서 싸우고 그럴듯한 근거와 논리를 내세우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다. 그 경험과 지식과 논리와 정보력, 즉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 소통이다.


남의 떡밥을 물고 조각조각을 띄어내어 내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자석이 밀고 당기는 원리가 무엇입니까?”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무려 7분이 넘는 시간 동안 ‘왜 그런 질문에 올바른 답을 줄 수 없는가’를 설명한다.


아주 간단한 질문에도 복잡한 내용들이 숨어있다. 우리가 흔한 일상의 대화를 할 때조차 ‘지구가 구(球)의 형상이다.‘ ’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살인은 나쁜 것이다.‘같은 명제에 대한 합의와 그 사람의 상식 수준에 맞춰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소통을 하는 것뿐이다. 상대의 지식수준과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 ‘단어’와 ‘주제’에 대한 합의가 없이는 간단한 대답조차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이 1시간 내내 헛바퀴만 돌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누군가의 작품에 댓글을 사람의 지식수준, 윤리적 가치, 진리의 범주 등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가벼운 소통은 가능하지만, 무엇을 설명하거나 해명해야 하는 행위, 즉 토론이나 논쟁의 형식이라면 그것은 의미 없는 아니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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