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냘레스에 있는 내내 레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된 필립과 제니 부부는 여러모로 인상적인 커플이었다. 처음엔 서로 어색해하다가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이 부부 역시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논스톱으로 여행하는 건 아니고, 그래도 몇 달씩 장기여행을 종종 가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남미 여행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쿠바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업을 하는 필립의 스케줄이 유동적이고, 제니는 여행 블로그를 운영 중이기 때문에 여행을 병행하기가 비교적 쉬운 모양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카우치서핑을 즐겨한다는 부분에서 굉장히 잘 통해 몇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장기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놀라웠다. 누누는 아직 세상에 나온 지 4년밖에 안 되었지만 벌써 60개국 이상 가보았다고. 물론 어릴 적 기억이 언제까지 가겠냐마는, 그래도 각국의 아가들과 놀면서 스스로 영어를 터득했다거나 면역력이 강해지는 등 여행이 자연스레 주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듯했다.
내가 굳이 휴학 중 세계여행을 떠난 이유는 나중에 취업, 결혼 등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였는데, 이 부부를 보면서 내가 고정관념에 빠져 있던 건 아닐까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 생기면 아무래도 자유롭게 살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리지만, 필립과 제니는 그들 말마따나 “계획에 없던 아이”를 가지고도 그대로 원하던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저런 가족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건 아니었을지. 또, 내가 너무 쉽게 한계를 옭아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 이들은 최근 누누의 동생까지 낳고서 4인 가족으로 여전히 세계여행을 다니고 있다.
제니와는 통하는 구석이 많아 유독 대화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첫날엔 누누를 필립과 재워두고 비냘레스 시내로 우리 둘이서만 나서기도 했다. 비냘레스는 큰길이 하나뿐이라 딱히 길 잃을 걱정도 없었고, 무엇보다 편했던 건 다른 도시처럼 따로 지정된 와이파이 스팟이 있는 게 아니라 큰길 전체에서 와이파이가 터졌다. 인터넷에도 접속하고 나중에 누누를 데려갈 놀이터도 찾아볼 겸 큰길을 따라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외국인 여자 둘이서 걸어 다니니 캣콜링이 어김없이 들려왔다. 나야 이미 익숙해진 터라 별생각 없이 걷는데, 제니는 적잖게 충격받은 듯했다. 지금까지는 내내 필립, 누누와 함께 다녔으니 단 한 번도 캣콜링을 당해 본 적이 없다며.
사실 필립과 제니는 둘 다 한 성격 하는지라 유치할 정도로 자주 싸우곤 했다. 중간에 껴 있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그래도 나름대로의 규칙도 있어서 재산도 합치지 않고 따로따로 관리한다고 했다. 월세도 매번 반반씩 내고 여행 경비도 누누 것만 분할하지 각자의 몫은 따로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제니가 필립의 “맥주 한 잔만”을 눈감아 주다가 본인이 기념품을 살 때는 필립에게 핀잔을 듣는 게 싫어서 이렇게 결정했다며,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시선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이 편이 깔끔하고 싸움도 줄이는 법이라고 흐뭇해했다. 여러모로 “가족”에 대한 나의 일반적 관념을 많이 깨버린 부부. 자신들만의 방도를 개척해 나가며 원하는 삶을 살던 그들을 보며,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부담이 한결 덜어졌다. 의지만 있다면, 다 하기 나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