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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Nov 23.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13. 저렴한 현지 투어에서 살아남기

[페루, 비니쿤카]

흡사 우리나라의 빌라촌 같은 골목에서 새벽 시간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간간히 길고양이들이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할아버지들과 눈이 마주칠 뿐. 내 이른 도착 시간에도 안 자고 있을 거라던 호스트 지미는 아니나 다를까 꿀잠을 자고 있었고, 한두 시간 후에야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지미의 넓은 집에 들어가 그가 끓여준 페루식 수프를 아침으로 먹은 후 함께 시내 구경을 나섰다. 


지미와 함께 만든 페루식 수프


미로 같은 시내 뒤편의 골목길을 구불구불 따라가다 보면 별안간 탁 트인 광장이 나온다. 색색깔의 건물들과 푸르른 나무들이 이루어 내는 조화가 아름다웠던 아르마스 광장. 분주하게 걸어가는 사람들과 한가로이 앉아 쉬는 사람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지미가 콕 집어 추천해준 인생 츄러스를 우적우적 씹는데 문득 ‘쿠스코에서는 한 번쯤 꼭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마스 광장을 구경하며 먹은 단돈 300원 인생 츄러스


쿠스코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마추픽추와 비니쿤카 투어. 다른 도시들보다 긴 시간을 할애했으나 그래도 투어를 다니려면 빡빡한 일정이었기에 바로 투어사부터 찾았다. 아르마스 광장에 널린 게 투어사들이지만, 마추픽추는 가는 길이 고생스럽기로 악명이 높아서 가격 대비 패키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했다. 여태껏 해본 그 어떤 투어보다도 빈부격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게 바로 이 투어였다. 자금이 넉넉하면 기차를 타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반면,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은 밴을 타고 일정 구간 이동 후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했으니까. 


마추픽추 투어 자체가 워낙 비싸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지라 차라리 한국인들이 대부분 이용하기로 소문난 파비앙 여행사에 가보았다가 200달러가 넘는 가격을 듣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알음알음 건너 들은 다른 투어사도 몇 군데 들러보고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가격에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찾아가게 된 아르마스 광장 귀퉁이에 자리한 작은 현지 투어사. 조그마한 크기에 영어도 능숙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추픽추 입장료 포함 1박 2일 투어에 비니쿤카까지 합쳐서 $100까지 가격을 흥정한 후엔 쉽사리 자리를 뜨기 어려웠다. 월등히 저렴한 가격에 의구심이 들어 숙소와 핫 샤워, 영어 가이드까지 재차 확인을 받고서는 예약을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다음날 비니쿤카로, 그리고 그다음 날엔 마추픽추로 향하게 되었다. 


비니쿤카는 알록달록한 색깔 덕에 무지개산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일명 ‘무지개산’으로 불리는 비니쿤카로 가기 위해 다음날 새벽 일찍 픽업 장소로 향했다. 아직 해도 뜨기 전, 깜깜한 하늘 뒤로 쿠스코의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그 야경을 위안 삼아 애써 불안한 마음을 짓누르며 픽업 장소에 도착했다. 나처럼 비니쿤카 투어 픽업을 기다리는 다른 여행자들이 왕왕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함께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각자의 투어사가 하나둘씩 이름을 불러 픽업해 가는데 내가 예약한 곳만 도무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그곳을 믿는 게 아니었나, 아픈 자책과 함께 길에 덩그러니 앉아 길고양이들만 바라보았다. 결국 내 픽업 차량이 구세주처럼 등장한 건 이미 해가 다 떠서 광장을 밝게 비추고 있을 때였다. 물론 그쯤 되니 픽업을 와줬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해서 늦은 것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긴 남미니까’ 한 마디로 넘어가게 된다. 


픽업을 기다리며 감상한 쿠스코 야경


하지만 늦은 픽업보다 더 막막했던 건 따로 있었다. 투어를 예약할 때 분명히 물어봤던 두 가지가 “혼자 여행객이 많으냐”와 “영어 쓰는 여행객이 많으냐”였는데 직원의 확신에 찬 끄덕임과는 정반대로 버스 안엔 삼삼오오 짝지어 온 남미 사람들만 우글거렸다. 가이드는 나에 대한 언질을 들었는지 마이크를 잡고 스페인어로 온갖 설명을 늘어놓다가도 마지막엔 나만 따로 불러서 영어로 속성 요약본을 읊어 주었다. 특별 대우라고 포장하기엔 수업 진도를 못 따라가는 보충반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스페인어를 하지 못해 왕따 쭈구리가 된 나는 괜스레 위축이 되었다. 비니쿤카에 도착하기 전, 조촐한 뷔페식당에 들러 투어에 포함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가장 구석에 들어가 앉아 밥 먹는 것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따스한 목소리로 영어가 들려온 것은. 


“으, 생각보다 많이 춥지?” 


칠레에서 온 캐시와 그녀의 남자친구 마우리는, 영어는 학교에서만 배워서 스피킹에 자신이 없다는 말로 연막을 잔뜩 쳐 놓고는 나와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는 언제 왕따였냐는 듯이 그들과 밝게 수다를 떨었고, 우리는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마우리와 캐시는 고산병에 대비해 코카잎을 가져왔다


돌이켜보면, 해발고도 5,000m의 고산지대로 호흡이 힘들기로 유명한 비니쿤카에서 내 힘으로 온전히 트레킹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캐시와 마우리 덕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의 정신력과 의지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나는 뼛속까지 타고난 여행 체질이라 그런지 이번에도 고산병은 겪지 않았지만, 눈과 우박까지 내리는 극한의 날씨에서 고산지대 트레킹을 하는 건 생각보다도 더 강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사막이나 화산 등 오만 곳에서 트레킹을 해봤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비니쿤카에서는 목표를 눈앞에 두고 1톤이 된 것만 같은 발을 힘겹게 떼어 다가가도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 마법이 발생한다. 추가 비용을 내고 말을 타며 편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심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우리와 캐시는 “유캔두잇!!”을 크게 외치며 밝은 미소와 함께 손짓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헐크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힘을 내서 다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과 걷는 게 무척이나 즐거워서였을까, 나는 진흙탕에 한 번 미끄러져 신발을 다 버리고도 그만 한바탕 웃어넘겨버렸다. 


눈과 우박을 뚫고 가다가 진흙탕에 엉망이 되어버린 나의 세계일주 신발...


색색깔로 물든 언덕이 보이는 무지개산 정상에서, 우리 셋은 얼싸안고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에 얼굴이 다 젖은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기쁨도 잠시, 하산할 땐 캐시도 체력이 동나서 천사 같은 미소를 잃고 마우리가 하드캐리해야 했지만…. 


쿠스코 시내로 돌아와 작별할 시간이 되자 나는 그들에게 마추픽추 투어도 같은 여행사에서 예약했는지 연거푸 확인을 했다. 그날 하루가 너무나도 즐거웠기에. 그들은 내일 보자고 해맑게 웃으며 떠나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남미 여행은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거의 9개월만에 연재를 재개합니다. 페루에서 생긴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게 소중했던 기억들이라 글로 잘 써내고 싶다는 부담감이 컸고, 실제로 쓰는 내내 고생했어요. 제 머릿속엔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데 막상 빈 페이지를 보면 막막한 기분만 들어서... 여전히 썩 마음에 차지는 않는 글이지만 제 경험이 독자분들께 조금이나마 와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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