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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Jun 20. 2022

생(生)의 의미, '자기 앞의 생'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되면서 유명한 프랑스 소설 한 권쯤 읽어 보고 싶어 손에 들게 된 책,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

다 읽은 책을 덮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소설은 창녀들의 아이들을 돈 받고 맡아 기르는 로자 아줌마네 집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로자 아줌마 또한 은퇴한 창녀인데, 프랑스에서는 창녀들이 아이를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이 제정되어 있어서 창녀들이 아이들을 맡길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로자 아줌마네 집의 특별한 아이, 모모(모하메드)는 열 살인데 때때로 인생을 달관한 듯한 문장들을 내뱉어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소설은 모모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사회 소외계층으로, 그들의 공통된 결핍-사랑-을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한 때는 잘 나가는 창녀였지만 이제는 사랑받지 못하고 양육비마저 끊긴 아이들을 홀로 돌봐야 하는 처량한 신세의 로자 아줌마. 로자 아줌마는 누군가 자기를 바라봐줄 것을 기대하며 어울리지 않는 기모노를 입고 화려한 화장과 가발로 본인을 치장하지만, 현실은 모모 외엔 자기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는 이가 없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와 일찍 헤어질 수가 없어 그의 나이를 4살이나 어리게 속인다.


모모는 한 창녀가 맡긴 아이였는데, 소설의 중반이 넘어서야 그의 아빠가 젊었을 때 엄마를 죽였다는 사연이 등장한다. 병세가 심각해서 자신이 곧 죽을 것 같다며 맡겼던 아이를 찾으러 온 아저씨가 아빠였는데, 그는 로자가 모모를 회교도가 아닌 유대인으로 키웠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 버린다.


평생 보고 싶었던 아이를 죽기 직전에 만나러 왔는데, 종교가 '대수'였던 친아빠의 존재를, 모모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모에게 진짜 엄마였고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은 로자 아줌마였다.


문제는 로자 아줌마가 심각한 비만과 지병으로 계단도 혼자 걸어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심각한 것인데, 모모는 점차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 곁에 남아 그녀를 보살피고 자신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로자 아줌마에 대한 모모의 사랑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는데, 모모는 곧 죽을 것 같은 로자 아줌마를 아무도 모르는 지하실로 옮기고 그녀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어 그 곁을 지킨다. 온갖 향수를 부어 자연의 법칙이 만들어내는 냄새를 지우고, 변해가는 얼굴색에 두텁게 화장품을 덧칠한다.


모모는 그 곁에서 3주를 지내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된다.


모모는 언젠가 하밀 할아버지가 말해 준 사람이 살 수 있는 이유-사랑-에 대해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읊조린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보고 싶다. 사랑해야 한다.

  

  

모모는 본인의 본인을 사랑해주는 로자 아줌마가 있어야만 존재 가치가 완성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역겨운 냄새와 썩어가는 시체를 부여잡고 무려 3주를 버텼다. 두려움과 공포, 역겨움도 이기게 하는 힘.


그가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던 것만큼, 절실히 엄마를 그리워하기도 했는데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허기를 상상 속의 광대를 불러옴으로써 달랜다.


광대들만은 죽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아무도 나를 찾거나 의미 있게 대해주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이 의미가 있을까.

 

누구에게도 이름 불리는 존재가 아니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다짐만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쪽방과 고시원에 나 홀로 거주하는 50세 이상 10명 중 6명이 고독사 위기라고 한다. 그들의 고독사 위기 판단은 사회적 고립가구인지에 대한 판가름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아래 문항들을 통하여 판단된다.


- 1주일간 필름이 끊길 정도로 '혼술'한 횟수

- 돈을 빌려줄 사람의 유무

- 일주일간 대면, 문자 소통 횟수

- 몸이 아플 때 돌봐줄 사람의 유무

- 울적할 때 대화를 나눌 사람의 유무


고독사가 단순히 몸이 아픈 사람이 우연히 혼자 죽게 되어 늦게 발견된 것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통 없이 혼자 고립되는 '고독'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노화, 그리고 고독

소설은 사랑의 의미뿐만 아니라 나이 들어감에 따라 찾아오는 필연적인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모모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릴 때는 무조건적으로 날 사랑해주는 부모님, 젊을 때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건강이 쇠하고 의지할 누군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할 때-겉모습과 통장이 그리 아름답지 않을 때-는 나를 필요로 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진다.


청춘은 너무 아름답지만 그래서 잔인하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 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노년기에 내가 본다면 청춘-를 지나간 시간의 후회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채우기는 너무 아깝다.

현재에 늘 존재하여 지금을 누리며 살아야 우리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이 값지고 의미가 있어진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후회되냐는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을 꼽는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었는가,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은 누가 있는가만 남는다는 말이다.


작가는 얘기한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함으로써 당신의 생을,
누군가의 생을 의미와 기쁨으로 채우라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썼던 작가는 '로맹 가리'로 나중에 밝혀졌다. 로맹 가리는 권위 있는 문학상을 이미 한 번 수상한 작가였지만, 입에 권총을 물고 자살했다.
실력도 평단에서 인정받은 그였지만, 정작 그도 사랑에 목마르고 갈급했었던 걸까. 소설의 말미에서 알게 된 작가의 생의 마지막 모습과 소설의 주제가 뒤얽혀 소름이 돋을 만큼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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