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지만 그래도 꿈은 결국 가짜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나 상위권에 오래 기록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종합1위를 3주간 기록했다. 이 책은 2020년 7월에 출간되었는데, 2021년 2월에 내가 구매한 책은 '14쇄'로 찍어낸 책이었다.
이름부터가 몽글몽글한 감성을 자극할 것 같은 이 책.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책을 다 읽은 후 처음으로 든 생각은 '내가 뭘 놓치고 있었나?'
생각할 거리가 너무 없어서 읽고 나서 허무한 감정이 밀려왔다. 하물며 베스트셀러 1위인데!
나는 좋은 구절이나 잠시 쉬어서 생각해야 할 지점이 나올 때면 페이지를 접어 놓거나 포스트잇을 붙여 완독 후 다시 그 부분을 곱씹어보는데, 이 책은 내가 표시할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작가 인터뷰를 보니 '부담없이 독서 재입문용으로 볼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 목표로 하셨으니 정확히 목표대로 쓰여진 책이다)
독서한 지 몇 일이 지난 지금,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니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그래도 명확히 있었다. 그리고 놀랍도록 현실을 반영한 책이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잠이 들면 무의식의 내가 꿈 백화점이나 상가에 들러 '좋은 꿈'을 열심히 고르고 구매해서 그 날 그 꿈을 꾼다. 꿈의 장르는 마치 영화 장르처럼 다양하며, 작품의 퀄리티 또한 독립영화에서부터 할리우드SF 제작비처럼 폭넓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꿈을 고른다. 꿈은 여러 의미가 될 수 있는데, 연애물을 고르는 사람에겐 설레임이라는 감정의 대리만족, 공포물을 고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오락거리, 자신의 특정 상황을 꿈으로 주문제작하는 사람에게는 트라우마 극복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에겐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된다.
현실의 우리도 때론 염원하는 꿈이 생긴다. 현실이 답답해서 해방감을 느끼고 싶을 땐 날아다니는 꿈, 오랜 모솔일 땐 당연히 연애하는 꿈을, 같은 팀 동료가 너무 얄미울 땐 그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꿈을 꿈꾸기도 한다.
꿈은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다른 상점들도 취급한다. 그 상점들과 꿈 백화점의 차이는 얼마나 다양하고 고품질의 꿈을 구비하느냐도 있겠지만, 꿈을 단순한 상품으로 보지 않고 각 사람에게 '영양제'처럼 맞춰 파는 달러구트의 판매철학 때문이다.
구매한 꿈을 꾼 손님은 다음 날 아침, 자신이 꿈을 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해서 지난밤 꿈이 자신의 무의식이라고 생각하고 꿈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같은 꿈을 너무 오래 꾸면 손님의 현실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꿈을 상품으로만 보는 타 상점과는 다르게, 달러구트는 꿈을 손님들의 현실을 도와줄 '보조제'의 역할로 바라본다. 그래서 꿈이 단순한 오락거리 뿐만 아니라 감정의 시험을 위한 도구,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도구로까지 역할을 넓히게 된다. 시험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현실에서도 의기소침했던 손님이, 수능시험을 반복적으로 꿈에서 치르면서 꿈 안에서 극복해 내는 것이다.
꿈의 세계에선 꿈을 꾼 이후에 느끼는 감정에 값이 매겨지고, 시기마다 각 감정의 가격이 주식처럼 등락한다. 꿈은 투자수단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를 테면... 크리스마스 시즌엔 '설레임' '애틋함' 같은 감정이 가격이 오르는 식이다.
꿈을 사서 되팔기만 하느냐? 여기서 재미있는 설정이 등장한다.
직접 복용해서 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따뜻한 차에 '담대함'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취업면접을 자신 있게 치를 수 있는 셈!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한 어떤 서사나 노력이 없어도, 감정을 직접 복용함으로써 내가 잠시나마 달라질 수 있다면, 이것은 마치 새로운 종류의 마약과도 같다.
내가 오늘 사고 싶은 감정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영하9도의 싸늘한 바람을 헤치고 출근한 오늘은 '포근함'이 적당히 필요하고, 지난 밤 지각하는 꿈을 꾼 나의 무의식은 '안정감'을 필요로 하는 것 같고, 독서하고 브런치에 서평을 남기고 있는 나를 보아하니 '성취감'이나 '뿌듯함'도 필요해 보인다.
사람들의 대부분의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해소시키기 위함임을 알고, '꿈'을 감정과 직접 연계시켜 하나의 판타지 세계를 구축한 작가의 상상력이 기발하게 느껴진다.
진짜 만족스런 꿈을 꾸고 난 아침에 종종 현타가 온다.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절망이 되기도 하니까.
꿈은 결국은 가짜이고 현실의 삶을 도와줄 보조제의 역할일 뿐이지 꿈이 대체제가 될 순 없다는 것.
작가는, 현실을 마주하고 내가 원하는 감정을 얻고자 내 힘으로 노력할 때, 마법처럼 좋은 꿈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아닐까?
현실을 도피하고픈 많은 현대인들에게 '꿈'만 꾸지 말고, 마주하고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 같다.
간단한 설정과 스토리로 생각할 거리를 이렇게나 던져주고, 31살 이공계 출신으로서 첫 책에 이렇게 잭팟을 터뜨린 작가님 덕분에 내 마음에 가득 쌓인 '부러움'과 '선망'이라는 감정을 오늘 꿈 시장에 내다 팔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