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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Sep 30. 2024

식물 그리는 목요일_240926

10_나무수국

  어느덧, 식물 그리는 마지막 시간. 버스를 기다리는데 땀이 나지 않는다. 불현듯 수업 초반에 그렸던 고마리가 보고 싶어 진다. 잘 있을까. 지금쯤이면 꽃을 피웠을 텐데... 이틀간의 폭우에 고마리가 무사할까.   

   

  거센 물살과 토사에 휩쓸려 무성하게 우거졌던 수풀은 모조리 쓰러져 누워 있었다. 잠시 쪼그리고 앉아 숨을 고르는데 설마. 고마리?     


  토사에 덮인 와중에도 영롱하고 환한 꽃송이를 피워낸 고마리가 보였다. 고마리 꽃은 갓 피어난 생기로 가득했다. 어떤 꽃송이는 꽃잎 끝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또 어떤 꽃송이는 투명하리만치 하얬다. 흙으로 뒤덮인 잎과 줄기를 보는데 고생스러움과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한 번 보이니 고마리 꽃이 자꾸자꾸 보였다. 내 시선이 닿는 족족 고마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건 아닐까.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수업시간이 촉박해져서야 고마리와 안녕. 아쉬운 걸음을 옮겼다.      


  쌈지숲 안쪽에서 제법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도서관을 향해 걷는데 계속 나무수국이 따라온다. 그래. 오늘은 너다.      


  순천에 와서 처음 본 나무수국. 나무수국은 매미가 세차게 울 무렵, 줄기 끝에 둥근 세모꼴 혹은 하트 모양으로 수북하게 방글방글 꽃이 핀다. 수국이 알감자라 치면 나무수국은 회오리 감자와 닮았다.     

 

 지금처럼 나무수국 앞에 멈춰 서 있었던 적이 있다. 몹시 우울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힘없이 걷고 있었다. 땅 가까이 닿을락 말락 피어있는 나무수국이 눈에 들어왔다. 땅과 나무수국이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무수국이 땅의 마음을 진찰하는 청진기로 보였다.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요동치던 마음이 괜찮아졌다.        


  내 마음까지도 진찰해 주는 나무수국 청진기. 나무수국 피어있는 길을 걸으면 마음을 동실동실 도닥여 주는 손길을 느낀다. 구름이 잠시 땅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리고 식물로 태어난다면 나무수국일 것만 같다.  

     

  나무수국의 오묘한 빛깔. 자연의 색과 모양은 같은 대상이어도 하나하나 다 다르다. 아무리 같게 그리려고 애써 봐야 대상과 완성된 그림 사이에는 격차가 있다. 마음속에 내가 그린 식물을 꼭꼭 잘 심어둔다. 생명을 느끼고 덩달아 나도 살아난다. 내가 그린 식물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수업은 끝나지만 나대로 식물 그리는 목요일을 계속 이어가려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식물을 계속 그리고 기록하고 싶다. 식물을 통해 나를, 나를 통해 식물을 알아가고 싶다. 점점 통해 간다. 사이좋은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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