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_금목서
어? 어디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두리번대며 코를 벌름댄다. 너를 찾는 데는 눈보다 코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정류장 인도 옆 잔디밭에 마디마디마다 올망졸망 살구빛 작은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는 금목서가 보였다.
네가 왔으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새 삶. 꽃잎을 펼치기도 전부터 꽃망울 전체에서 꽃향기가 감돈다. 감출 수 없는 사랑처럼. 에취!
순천에 와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찬 기운에 몸을 웅크리기 시작할 즈음, 동네를 산책하다가 금목서 향을 처음 맡았다. 처음엔, 누군가가 뿌린 좋은 향수의 잔향인 줄 알았다. 무슨 향수인지 모르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향수 주인을 만나면 용기 내서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향수를 쓰나요?"
이상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향이 났다. 코를 열고 향기를 추적했다. 팔마 경기장 둘레에 심긴 한 그루의 금목서를 발견했다. 방그란 원형에 가까운 나무 모양. 웃는 눈 모양 다정한 이파리들. 잎을 가릴 정도로 주루룩 줄기를 따라 주홍빛 앙증맞은 꽃이 피어있었다. 금목서를 보려고 맡으려고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도 금목서 필 날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완전히 잊고 있다가 불쑥 새 삶을 얻는다. 거저. 걷는 길마다 금목서가 졸졸 따라온다. 신나라. 낭만이 폴폴 날아다닌다.
금목서는 바짝 다가가서 냄새를 맡는 것보다 조금 떨어져 있어야 향이 저 알아서 훌훌 다가온다. 금목서 말고도 흰 꽃을 피우는 은목서도 있다. 은목서는 금목서에 비해 좀 더 가분하고 명랑한 향이 난다. 깊어가는 가을, 자칫하면 마음도 쓸쓸해지기 쉬운데 목서들이 있어서 기분을 올리고 기운을 낼 수 있다. 목서향에도 불호가 있다는 건 놀랍다. 아빠는 냄새가 진하고 독해서 싫다고 했다.
"저희 집 마당에 금목서가 있어요."
"오! 진짜요?"
언젠가 금목서가 집 마당에 두 그루 심겨 있다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말에 남자에 대한 호감도가 급하게 급 치솟았고 더 나아가 그와 나란히 그 집 마당에 함께 있는 얼토당토않은 상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한참 전에 남자와는 끝난 마당이다.
금목서를 그리기로 마음먹고 쌈지숲을 돌며 식물을 살피는데...
"거기서 뭐 해?"
멀찌감치서 인상을 쓴 채 내게 말 건네는 할머니. 나를 아는 사람처럼 쳐다보는 뉘앙스.
나는 웃으며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셨나 봐요."
할머니가 바로 앞에 지나갈 때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자꾸 자신을 향해 말하는 내게 어쩔 수 없이 물어본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아줌마는 여기서 뭐해요?"
"식물 좀 보면서 사진 찍고 있어요."
"으휴..."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줌마, 찬물 한 번, 한숨 찬물 두 번. 찬물 두 번을 연달아 맞고 뒤를 돌아보니 길 끝에 할아버지가 있다. 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다. “거기서
뭐해“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그
말을 나에게 던진 말로 착각하고 받아버린 것이었다. 부끄러라.
으휴... 할머니의 깊은 한숨은 나를 향한 것이었을까. 이번에도 나의 착각일까. 할머니는 단지 쌈지숲 걷기가 고되었거나 할아버지를 향한 한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할머니의 한숨은 왜 자꾸 내게로 돌아올까. 숲에서 어정대는 내가 모르는 할머니 눈에도 한심해 보이나. 한숨. 한심. 한숨. 한심... 내게서 한심한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나. 무방비 상태로 맞은 찬물 덕에 한기가 돈다.
할머니의 저, 한숨 어딘가... 낯설지 않다. 엄마도 내가 식물을 그리고 있으면 저리 한숨을 내쉰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고 혀를 찬다. 텃밭에서 김매기나 할 일이지 잡초를 애지중지 그려대고 있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한숨 나올 밖에. 나는 엄마의 한숨 유발자인가.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싶은 식물을 발견하고 그려야 살아나는 걸. 피어나는 걸. 칫! 누가 뭐라든 내가 나 자신을 한심해하지는 않겠다! 남 눈치, 내 눈치 안 보고 한숨, 한심 다 안녕하고 오늘은 금목서를 그릴 거다. 남 눈치 보느라 내 눈치 보느라 마음껏 그릴 수 있는 시간과 자유를 포기하지는 않겠다. 한심에 휘말려 내 복을 내 발로 차지는 말아야지. 어깨 활짝 열고 목서를 껴안아야지. 목서향을 한아름 품고 다니다 엄마 방에 모조리 흘려 놓아야지.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분명한 이미지가 있다면 좀 더 편하게 처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것조차 없으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다 보니 늘 뭔가가 삐걱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나 자신이 지겹다.
-새벽의 모든, 세오 마이코, 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