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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Jun 04. 2020

망우삼림(忘憂森林)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숲

#서울무드, 네 번째 이야기. 현상소 이야기

필름 사진을 찍게 되면 현상소를 빼놓을 수 없다. 필름을 찍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단번에 알겠지만 필름 자체가 현상을 하기 전에는 사진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현상소는 필름 사진을 찍는다면 굉장히 자주 가게 될 곳이고, 한국에서 현상소들이 제법 많이 밀집해있는 곳은 서울, 그것도 충무로, 을지로 일대라고 생각한다.


필름 사진은 빛에 반응하는 필름을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는 필름실 안에 넣어주고, 노출에 맞춰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지정한 뒤 셔터를 열어, 필름에 우리가 찍고 싶은 상을 맺히게 하는 것이다. 찍은 뒤에도 필름은 여전히 빛에 노출되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필름실을 열지 않고, 다 찍고 난 뒤 필름을 다시 감아 현상소에 맡기게 된다.  


필름을 처음 사용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헷갈려하시는 단어 중에 하나가 '현상'과 '인화'인데, '현상'은 다 찍은 필름에 상을 고정시키고, 빛이 있는 곳에 꺼낼 수 있도록 약품처리를 하는 것이라고 보면 편할 것 같다. '인화'는 현상이 완료된 필름을 가지고 인화지 위에 사진을 크게 뽑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요즘에는 프린팅 기술이 좋아져서 사진을 컴퓨터에서 바로 프린팅 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확대기에 필름을 껴서 인화지에 적정 노출을 줘서 상이 맺히게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대부분 현상 후 스캔을 해서 컴퓨터로 많이 받아보기 때문에 일반적인 취미로 찍는 사람들이라면 '현상, 인화'보다 '현상, 스캔'을 더 많이 한다.


을지로 3가 역 카페 '도록'에서 보이는 망우삼림, Nikon F3, Kodak Gold 200, 2020


서론이 조금 길었지만, 현상소는 위에서 말한 대로 사진을 현상해주는 곳이다. 따라서 필름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기 위해 어디가 되었든 현상소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내가 자주 가는 현상소인 망우삼림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다시 사진을 시작했을 때에는 LP를 한창 모으고 있었을 때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돈이 많이 나가는 취미밖에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당시의 나는 아날로그에 완전히 심취해있었다. 아날로그가 주는 약간의 불편함에 숨은,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의 향수에 젖어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가고 있지만 유독 그때가 제일 심했다.


당시에는 이곳저곳 현상소를 옮겨 다니면서 현상을 했는데, 그때는 그냥 사진만 볼 수 있으면 어디든 좋았더랬다. 스캔한 사진의 크기도 상관없고, 최대한 빨리 사진을 볼 수 있는 곳이면 만족했다. 그때의 나에게 사진이란 인스타에 '난 사진도 아날로그를 즐기기 위해서 찍는다~'라는 것을 업로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통해 '망우삼림'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어느 현상소보다도 독특한 그 무드에 반해 홀리듯 방문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장님이 LP를 들으신다는 것도 한몫했다.


망우삼림에 놓여있는 LP들, Nikon F3, Kodak Gold 100(Expired), 2020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람이 많지 않던 터라, 놀러 가서 사장님과 LP나 사진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LP들도 직접 듣기도 했었다. 이 때는 다른 직원 없이 사장님 혼자서만 운영하실 때였고, 누차 말하듯 사람이 많지 않던 때라 가능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소문이 많이 나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중에 찾아오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같이 사진을 찍는 분들 중에는 망우삼림을 농담 삼아 '을지로의 필름 블랙홀'이라고 부르시는 분도 계시다.


빈티지한 시계, 필름 건조기와 필름 보관함, Zenzabronica SQ-A, Kodak Ultramax 400, 2020


테이블 위의 소품들, Zenzabronica SQ-A, Kodak Ultramax 400, 2020



망우삼림에 처음 들어갔을 때 느낀 것은 홍콩이었다. 초록과 붉은색의 조화, 그리고 창문에 붙어 흔들리는 꽃무늬 쉬폰 커튼 등은 사장님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인테리어였다. 왕가위 감독의 팬인 사장님의 센스 덕분에 그 느낌을 많이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창 밖으로 붉게 빛나는 망우삼림 네온 간판을 보고 있자면 여기가 홍콩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것만 같다.


편애적이긴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망우삼림을 이야기할 때 내 감성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떻게 보면 이 현상소를 다니면서 내 사진 스타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매 번 칼같은 작업 시간과 작업물은 기본이다. 미워할 수가 없다.


망우삼림이라는 이름은 출입구 위에 붙어있는 글귀처럼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숲"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곳에 간다고 나쁜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 아닐까 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는 대만에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을 안고 매 번 현상소 문을 연다.


필름을 찍는 사람들에 따라서도 현상소가 굉장히 많이 갈리는 편인데, 각자 자기만의 이유로 현상소를 고른다. 어떤 곳은 빨라서, 어떤 곳은 품질이 좋아서, 어떤 곳은 가까워서 등 개개인마다의 스타일에 따라 현상소를 정하고 필름을 맡긴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현상소를 고를까.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 필름을 찍고싶으신 분들이라면 각자의 무드에 맞는 현상소를 골라 즐거운 필름 생활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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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무드에 나오는 사진은 하고필름(@hago.film) 인스타그램에서 나온 사진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을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하시면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서울무드>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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