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6
농산물 시장에서는 불편한 워딩들이 참 많습니다. 경매시장에서 사용하는 일본어의 잔재들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말은 곧 의식 수준을 반영합니다.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던 말들이라도 시대가 변하고 우리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말들도 생기게 마련이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지칭하는 말들, 성차별적인 말들도 그러하죠. 유니섹스가 젠더리스로 변화하는 것처럼 말이죠.
농산물 시장에서 제가 싫어하는 말들이 몇 개 있습니다. 겉모습으로 차별하는 단어들인데요. 대표적으로 B급, 못난이, 가정용 등이 있습니다. B급, 못난이 이야기는 제가 오래전부터 했던 이야기고요. (저희 브런치북 '과일로 바라보는 세상'을 통해 다뤘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딱히 자료집에 나와있거나 공식화된 용어는 아니지만 농산물은 외형에 따라서 등급을 나눠서 크고 모양이 고른 것들은 '선물용', 크기가 작거나 혹은 모양이 고르지 않거나 흠집이 있는 것들은 '가정용'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해서 판매를 많이 합니다. 누가 먼저 쓰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제가 두고두고 불편한 워딩이 바로 '가정용'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이 scene에서 그동안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을 저는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남성들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바닥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을 텐데요. 손님들 중에도 불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없으셨어요.
'가정용'이라는 워딩은 지극히 가부장제의 산물이라고 저는 봅니다. 집이라는 공간, 가사 노동 자체를 천시하는 문화에서 태어난 말입니다. 가정이란...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혹은 집에서 애나 봐야 하는 그런 공간으로 늘 취급당해 왔으니까요. 집안일은 당연히 아무 일 취급을 받아왔고요.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 먹는 밥은 그냥 대충 아무렇게 먹어도 되는 밥이었습니다. 농산물에 붙는 '가정용'은 딱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도 아니고 생명체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산물은 생명체입니다. 농산물을 대하는 태도에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농산물에 사용하는 가정용이 '공업용 / 가정용' 구분할 때의 가정용의 의미로 쓰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새를 알게 된 이후에 과거에 '새대가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썼던 저의 지난날을 정말 많이 반성했습니다.
우리 이제 농산물 시장에서 '가정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요? 다른 좋은 말로 바꿔 사용하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그냥 아무 말도 붙이지 않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성별을 이분법적 논리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듯이 꼭 등급을 매겨서 나누고 이름을 붙여야만 할까요? 그냥 과일로만 대할 수는 없는 것인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냥 사람이듯이요. 아무런 수식어가 붙지 않을 때 더 아름다운 것은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프랑스의 철학자 실비안 아가생스키는 말합니다.
우리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가치 없게 여기는 역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집안일이 더 어리석지도, 덜 유용하지도 않은
직업이나 노동이 될 수 있도록
가사 노동에서 '가사'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려야 합니다.
신형철 작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우리의 말도 바뀌어야 합니다.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